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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문 님의 이야기

함께 웃으며 일어설 용기를 주는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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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삶 | 꿈

가족이 옆에 있고, 기본적인 것들이 갖춰져 있는 그 평범함이 되게 중요하고 좋은 것이라고 생각해요. 어느 날 딱 좋은 일 생긴다고 좋은 삶이 아니라... 같이 밥 먹고 같이 있는 게 정말 좋은 거였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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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박정문 님은 2002년에 태어났다. 9살 터울의 오빠와 4살, 8살 터울의 남동생과 여동생이 있다. 오빠는 어머니가 정문 님의 아버지와 재혼하기 전 첫 결혼에서 얻은 아이다. 오빠는 경계선 지적 기능을 가졌는데, 처음부터 아버지가 심하게 홀대했던 것 같다.

하루는 오빠가 두세 살쯤 된 정문 님에게 장난을 쳤다고 아버지에게 몽둥이로 무자비하게 맞았다. 그때 본 광경이 엄청난 충격이었는지 아직도 머릿속에 남아 있다. 오빠는 그날 이후 집을 나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서야 오빠가 성인이 되기 전까지 줄곧 시설에서 생활했다는 사실을 어머니에게 들어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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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해체를
경험하다

어린 시절 최초의 기억은 어머니가 일하는 동안 아버지와 함께 동네 공원에 다니던 것이다. 아버지는 첫 아이인 정문 님을 많이 예뻐했고 매 순간을 비디오카메라로 찍어줬다. 그러나 아버지가 다정한 분이었다고 기억하지는 않는다. 아주 어릴 적부터 부모님이 싸우는 상황을 자주 목격했고 일곱 살 무렵 가족의 위기를 인식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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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무섭게 울던 어느 날 밤 두려움에 떤 기억이 있다. 이후 오랫동안 어머니를 볼 수 없었다. 그때부터 아버지는 괴성을 지르며 정문 님과 동생들을 을러댔고 유치원이나 학교도 보내지 않은 채 방치했다. 그 무렵부터 동생들을 홀로 돌봤던 것 같다. 어린 동생들을 제대로 돌봐줄 어른이 없어 정문 님이 거의 늘 함께했다. 또래와 자유롭게 놀아보고 싶었으나 꿈도 꿀 수 없었다. 가끔 동생들이 버겁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부모님은 정문 님이 초등학교 2학년 때 이혼했다. 가족의 해체를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을 나이인데, 정문 님은 어머니를 이해했고 오히려 이혼을 독려했다. 아홉 살 어린이가 보기에도 아버지는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는 폭력적인 사람이었고, 그에 대해 공포와 분노가 일었기 때문이다. 당시 어머니 혼자 일하며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었다. 가족을 위해 악착같이 사는 어머니를 폭행하는 아버지를 용납하기 어려웠다. 정문 님은 어머니의 불행이 아버지를 만나 시작됐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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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보이지 않다

태어나 처음 속한 사회 집단인 가족 안에서 안정적인 관계를 맺지 못한 탓에, 정문 님은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많이 위축돼있었다. 내향성이 강해 친구들과 어울리기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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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혼자 생계를 책임지느라 바빴고 부모님의 관계는 늘 위태로웠기 때문에, 집에서 학교 생활의 괴로움을 털어놓을 생각조차 못 하고 홀로 앓았다. 친구들과의 관계가 눈에 띄게 악화된 것은 5학년에 올라가고부터다. 이유도 모른 채 SNS상에서 무차별적인 집단 괴롭힘을 당했다. 감당하기 어려웠고 상처가 깊어져갔지만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몰랐다. 그저 아무렇지도 않은 척 무시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면전에서 심한 욕설을 들을 때면 이겨낼 도리가 없었다. 정문 님에게 학교는 폭력적이고 무서운 공간이었다.

“그때부터... 그때부터 누가 저 보고 수군거리면 되게 무서워했던 것 같아요. 지금도 되게 무서워하는데 그때는 정말... 엄마한테 맨날 학교 가기 싫다고 했어요. 엄마는 그래도 가라고 하셨죠. 또 아무리 아파도 학교는 반드시 가야 한다고 하셨거든요. ”

힘든 시간을 보내는 동안 어머니 외에는 주변에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없었다. 어쩌면 정문 님이 어려서부터 어머니가 인간관계에서 받은 상처를 토로하며 가족 말고는 세상에 믿을 사람이 없다고 강조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는 의지하고 싶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정문 님은 자신감 없이 학교 생활을 이어갔다. 주변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많이 의식했고 눈치를 점점 더 심하게 봤다. 하고 싶은 일을 찾기도 어려웠다. 오로지 어머니의 생각만이 절대적이라 여겼고, 어렵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경험한 어머니가 “선생님이나 공무원이 돼야 안정적으로 살 수 있다”라고 했으므로 그렇게 될 꿈만 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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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찾으려
부단히 애쓰다

초등학교 시절 겪은 따돌림이 트라우마로 남아서일까? 정문 님은 인간관계로 인한 스트레스가 심한 편이다. 언젠가 친구들과 싸우면서 힘든 시기를 보낸 적이 있는데, 그 여파로 편마비성 편두통*이 발병했다. 피곤하거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증세가 심해져서 움직일 수가 없다.

* 일시적인 반신마비 혹은 반신 불완전 마비를 동반하는 편두통. 반마비성 편두통, 반신마비 편두통으로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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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도 예방 차원에서 약을 꾸준히 먹고, 만약을 대비해 진통제도 상비해둔다. 그래서 정문 님은 스트레스를 쌓아두지 않으려고 늘 조심하고 노력한다. 쇼핑을 하거나 달콤한 것을 먹으면서 기분을 풀기도 하고, 소리를 지르거나 엄청 울어대거나 다 잊고 자거나 하면서 속에 쌓이는 것을 순간순간 없애려고 한다.

이런 일련의 사건을 겪으면서 정문 님은 외향성을 기르기로 마음먹고 노력했다. 친구들에게 마음을 열고 한 명 한 명과 관계를 만들어나갔다. 관계 맺기를 차근차근 연습하며 어려움을 극복해가다 보니 중학교 때부터는 친구가 생기기 시작했다. 친구들과 추억을 만들면서 재미있는 학교 생활을 했다. 어두운 모습에서 벗어나 밝게 지내다 보니 하고 싶은 것, 좋아하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무렵 패션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는 꿈이 생겼고, 어느 정도 확신이 들자 어머니에게 말했다. 어머니는 뒷바라지할 여유가 없는데 성공할 가능성이 희박한 분야로 나가겠다는 딸을 탐탁지 않게 여겼고, 정문 님이 선생님이 됐으면 하는 바람으로 어려운 형편에도 계속 학원에 보내 공부를 시켰다. 체벌이 만연한 학원이었지만 어머니는 성적만 잘 나오면 된다고 생각했는지 개의치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정문 님은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시간은 오래 걸렸지만, 어머니는 결국 뚝심 있게 꿈을 밀고 나가는 정문 님의 편에 서줬다.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꿈을 이루기 위해 본격적으로 준비했다. 학교 미술 선생님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틀린 정보를 바탕으로 입시를 준비하던 중에 선생님이 방향을 바로잡아줬다. 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이유로 미술 학원을 그만둬야 했던 시기에, 방과 후 교실에서 입시 공부를 계속할 수 있도록 기회를 마련해줬다. 그 선생님은 정문 님 마음 속에 가족 외에 믿어도 되는 첫 번째 어른으로 남아 있다.

고등학교에서 동아리 활동도 열심히 했다. 연출에 관심이 많아 3년 동안 방송부에서 카메라우먼으로 활약했다. 집단 문화가 수직적이어서 선배가 부르면 사생활은 뒷전에 두고 달려가야 했다. 얼마나 힘든 생활이었는지 정문 님이 가입할 당시만해도 열한 명이었던 부원 수가 졸업할 무렵에는 서너 명으로 줄어 있었다. 다른 친구들처럼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매일 들었지만 끝까지 역할을 해냈다. 이제 뿌듯함은 희미해졌지만, 스스로 끈기를 시험하고 책임감을 확인해본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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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애처로운
우리 엄마

정문 님의 어머니는 아이들이 아버지 없이 살면서 받을 상처를 많이 걱정했다. 이혼 후 빈자리를 메꾸기 위해, 본인은 원치 않았어도 가끔 아버지와 가족처럼 어울려 지냈다. 집에서 함께 식사도 하고 놀이공원에 놀러도 갔다. 아이들이 아버지를 원망할라치면 “천륜은 거스를 수 없다”며 아버지와 관계를 이어가도록 달랬다. 정문 님은 그런 어머니의 노력을 저버릴 수 없어서, 데면데면한 사이지만 아직도 이따금 아버지를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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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한테 엄마는... 엄만 되게… 좀 불쌍하고 그래요. 되게 좀 안쓰러워요. 동정해서 안쓰럽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너무 그래요. 엄마만 보고 있으면 진짜 좀, 되게 미안해요. 그런 생각이 많이 들어요, 어렸을 때부터. 아빠의 모든 화풀이 대상은 항상 엄마였고, 그런 걸 다 감수하는 게 엄마였고, 우리를 케어하는 것도 엄마였고, 정말 힘들게 사셨어요. 심지어 저를 낳고 집에 돌아오던 날부터 제대로 된 조리 한번 못 받으시고, 바로 집안일을 하셨다는 게... 정말 사람으로서 저건 아니라고 생각하고. 오죽하면 엄마가 절대 자기처럼 살지 말라고 저한테 수십 번 그러시더라고요. 그럴 정도로 정말, 정말 되게 미안, 미안한… 항상... 항상 노력하셨어요. 저희를 많이 챙기려고도 하셨고, 돈 벌려고도 많이, 열심히 일하셨고. 항상 노력하셨어요.”

어머니에게는 정문 님의 오빠가 가장 아픈 손가락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막내도 갑상선 기능 저하증 질환을 가지고 태어났다. 2020년 막내가 갑작스럽게 뇌출혈로 쓰러졌는데, 그때 신체 나이는 12살이지만 지적 수준은 4살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이후 어머니가 동생을 보살피기 위해 식당 일을 그만두면서 정문 님 가족은 경제적으로 더욱 힘든 상황에 내몰렸다. 주민 센터나 드림스타트 센터 같은 기관에 도움을 청해 조금씩 지원받았지만, 병원비, 치료비, 생활비 등을 모두 감당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었다. 어머니는 해결책을 찾아 지인들에게 돈을 빌리기도 하고 ‘계’ 형태로 부적절한 경제 활동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후자가 문제가 되어 정문 님이 고등학교 3학년 때 경제 사범으로 구속됐다.

마지막까지 아이들에게 안 좋은 모습을 보이기 싫었던 어머니는 집에서 체포되기 전에 경찰에 자진 출석했다. 구속되기 전날에는 정문 님을 앉혀놓고 살림 돌보는 일에 대해 세세히 알려줬다. 앞서 주민 센터에 도움을 요청해 정문 님과 동생들이 수감자 자녀를 지원하는 아동복지실천회 ‘세움’이라는 기관과 연결되도록 미리 조처해둔 터였다. 결혼 후 오직 가족을 위해 몸과 마음을 혹사하며 살아온 어머니는, 수감될 때조차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기보다 보호자 없이 남겨진 아이들, 특히 동생들을 돌봐야 하는 정문 님을 걱정하며 운명을 덤덤히 받아들였다.

정문 님에게 어머니는 안쓰럽고도 가장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다. 아이들이 부족한 티 나지 않게 하려고 엄하게 가르쳤고 교육열도 높았다. 정문 님의 잘못을 너그러이 받아주기도 했다. 때로는 친구처럼 지냈고 함께하면 웃을 일이 많았다. 그런 어머니를 생각하면 이 모든 상황이 원망스러운 게 아니라, 미안하고 애잔한 마음이 점차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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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감당하게 된
세상의 무게

어머니가 갑자기 일상에서 사라지고 나자 하루하루가 힘들었다. 어머니를 만나러 간 날이었다. 면회 전에 분명 이런저런 상상을 했는데도, 막상 생경한 옷을 입은 어머니를 보자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터져버렸다. 무엇보다 힘들었던 것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평소처럼 살아가기 위해서, 그리고 동정받고 싶지 않아서 가면을 쓰고 거짓말을 하는 자신을 마주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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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엄마가 그렇게 됐다고 해도 주변에 좋게 얘기를 할 수밖에 없어서 되게... 되게 이질적이었던 것 같아요. 아파서 어디 치료받으러 가셨다고 그렇게 얘기했죠. 그러니까, 꾹꾹 삭이고 있으니까 너무 힘든 거예요. 근데 진짜 그걸 생각 안 하려고... 차라리 생각 안 하고 그냥 다른 걸 더 열심히 해서 산 것 같아요. 엄마는 거기 가셨는데, 그리 가셨는데, 정작 주변에는 다르게 얘기해야 된다는 현실도 이질적이었고 너무 힘들었던 것 같아요...”

‘세움’을 만나기 전 세상이 무너져 내릴 것 같던 순간들에 곁에서 도와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른들은 수시로 연락해 어머니의 행방을 묻거나 감당하기 힘든 말을 쏟아낼 뿐이었다. 참기 힘든 심적인 고통이 점점 더해져 약 없이는 살 수가 없었다. 참담하고 냉혹한 현실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무기력함을 절실히 느꼈다.

“저희가 아무리 힘들어도 다들 말로만 도와주는구나 하는 걸 되게 많이 느꼈고, 이래서 사람이 자원도 중요하고 이것저것 중요하구나 하는 걸 그때 뼈저리게 느낀 것 같아요. 엄마가 힘들 때 여기저기에 도와달라고 많이 말씀을 하셨거든요. 그런데 엄마가 말씀하실 땐 아무도 안 듣다가... 한번은 사촌 언니한테 잘 지내냐고 연락이 왔어요. 엄마가 다 해결하지 못한 무슨 일이 있었나 봐요. 그런 일을 막 저희한테 뭐라 하시는 거예요. 정말 저희를 불쌍하게 여기지도 않는 건 둘째 치고, 엄마를 무시하는 행동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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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코 희망을
놓지 않다

어려운 상황에도 정문 님은 대학에 합격했다. 그렇게 원하던 패션 공부를 하게 된 것이다. 등록금 문제도 ‘세움’에서 여러 방면으로 알아봐준 덕에 해결했다. 어머니도 2021년 6월이면 석방된다. 어머니가 돌아오면 모든 게 다시 괜찮아질 것이다. 다 해결되지는 않겠지만, 어린 나이에 가장 역할을 도맡아 홀로 집안을 돌보면서 학교에 다니는 지금보다는 조금 더 자유로운 그림을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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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 님에게 현재 가장 필요한 것은 집다운 집이다. 케케묵은 냄새도 나지 않고, 벌레 때문에 고생하지도 않고, 빗물이 새지도 않고, 추울 때도 외풍이 없어 따뜻하게 지낼 수 있는 공간에서 아무런 제약 없이 자유롭고 편안하게 지내는 꿈을 꾼다.

“햇빛이 잘 들고 방 세 개가 있는, 꼭 방 세 개가 있는, 바퀴벌레가 없는 아파트에서 살고 싶어요. 주택은 싫어요. 특히 주택은 길가에 있는 게 싫은데요. 제가 지금 길가 집에서 살고 있어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담배 때문에 엄청 고생하고 있거든요. 맨날 싸우고 있는데, 아우 진짜 왜 피우는지 모르겠어요. 담배 때문에 엄청 고생하고 있는데 아파트는 그런 게 없잖아요. 아, 정말 살고 싶습니다, 네. 진짜 나중에 꼭 돈 벌면 갈 거예요.”

정문 님은 어머니를 교도소에 보내고 절망에 빠져 집에 웅크리고 있던 시간을 되돌리려는 듯 힘껏 당당하고 활기차게 세상에 나서고 싶어 했다. 한편으로는 다 포기하고 싶던 시기를 잘 버텨낸 자신을 칭찬하기도 했다. 끝내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함께 버텨온 동생들, 그리고 어머니 덕분이다. 정문 님에게는 가족이라는 존재가 무척 중요하다. 아버지를 제외하고는 서로 거리낌 없이 대할 만큼 친밀한 유일무이의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청소년기에는 오랫동안 빨리 취직해 안정적인 수입을 얻는 것만이 어려운 형편에서 벗어날 길이라고 여기며 진짜 꿈은 꺼내보지도 못하고 살았다. 여러 난관을 지나 원하던 공부를 하는 지금은, 졸업 후 좋아하는 분야에 진출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과분하게 감사한 일이리라고 생각한다. 하루빨리 패션 업계에서 일하며 가족들에게 보탬이 되고 싶은 마음뿐이다.

요즘 정문 님은 지방에 있는 학교에 다니기 위해 동생들과 떨어져 지내야 하나 고민이다. 통학이든 자취든 단점이 보인다. 둘째 동생이 집안을 잘 돌보지만, 그래도 두 동생을 남겨 두고 떠날 생각만 하면 마음이 무거워진다. 어머니가 곧 출소하시니 어떻게든 잠깐만 버티면 되는데 결정을 내리기가 쉽지 않다.

정문 님은 소박한 희망을 품고 있다. 가족이 함께 밥 먹는 일을 중요하게 여기는 어머니의 뜻을 따라, 어머니, 동생들과 마주 앉아 식사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다. 그 안에서 가족끼리 공감하고 웃으며 보낼 시간을 상상하니 다시금 앞으로 나아갈 용기가 생기는 것 같다.

“(제게 좋은 삶이란) 기본적인 것들이 갖춰져 있고 그 왜 주변에 이제... 사람들이 있잖아요. 가족. 지금은 엄마가 어쩔 수 없이 멀리 있는 상황이지만, 누군가 곁에서 안 떠나는 그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