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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 님의 이야기

가장 나다울 수 있는 공간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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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삶 | 꿈

저는 자우림을 되게 좋아하는데 (...) 이 사람은 나한테 아무 말도 안 했지만, 이 사람이 내 아픔을 들어주고 위로해준다는 감정을 느끼잖아요. 그냥 나도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 그런 생각이 많이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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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이인 님은 2000년 청주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어머니 품을 좋아해 어머니 옆자리를 차지하려고 형제들과 다투곤 했다. 사람들이 형과 동생을 더 예뻐한다고 생각해 누구보다 열심히 집안일을 돕고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애썼다.

노력 끝에 관심과 칭찬을 받았지만 그것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행위에 대한 것임을 알았을 때, 사랑받고 싶은 마음을 쉽게 채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집안일이라든가 심부름이라든가 나서서 했어요. 나중에는 예쁨을 어느 정도 받았죠. ‘얘는 커피도 잘 타고 싹싹하네’ 하는데 결국은 저를 칭찬해주는 게 아니라, 제 행위를 칭찬해주는 거잖아요. 그래서 마음을 채울 수가 없다고 느꼈는데, 그렇다고 그 외에 온전히 사랑받을 수 있는 방법도 못 찾겠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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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아이로
사랑받다

학교에서 이인 님은 ‘착한 아이’였다. 선생님들은 그런 이인 님에게 관심과 애정을 보여줬다. 그 관심과 애정이 좋았다. 그것들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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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좀 나이가 있는 분이었는데, 제가 친구랑 놀다가 밤 9시엔가 귀가한 적이 있거든요. 그런데 그때까지는 밤늦게 집에 들어간 적이 없던 거죠. 연락도 안 하고 놀다가 들어가니까 학교에도 전화하고 그랬나 봐요, 엄마가. 다음 날 선생님이 말씀하시더라고요. ‘누군지는 말 안 하겠는데, 뭐 이렇게 한 이가 있다. 걔가 평소에 너무 착하고 좋은 애라 따로 부르거나 혼내지는 않겠다.’ 근데 오히려 그게 더 쪽팔린 거예요. 내가 뭐가 틀렸네, 그런 생각이 들어서.”

학교에서 처음으로 꾸중을 들었을 때, 선생님이 더는 자신을 좋아해주지 않을까 겁이 났다. ‘착한 아이’로 생활하는 것은 녹록지 않았다. 다른 친구들보다 큰 기대를 받았고, 거기 부응하기 위해 애써야 했다. 때론 이해할 수 없는 일에 수긍해야 했다. 그 시간들은 마음에 크고 작은 응어리를 남겼다.

“늘 엄마랑 손잡고 다녔거든요. 시장 같은 데 가도. 제가 사춘기가 왔는지 한번은 친구들이 있길래 손을 탁 놓으니까 엄마가 삐치신 거예요. 형하고 동생은 한 번도 손 안 잡고 다녔으면서. 저도 그걸 정말 사랑해서라고 해야 할지 엄마가 불쌍해서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엄마를 챙겨주고는 했는데, 그게 갈수록 조금 심해지고 그래서 그랬던 거죠.”

“저를 되게 사랑해주시는데 엄마도 사랑을 주기만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닌 거예요. 사랑을 준다는 것에는 기대도 그만큼 있고 받을 생각도 있는데. 그게 힘들어진 거죠. 엄마는 점점 과해지고.”

집에서 이인 님은 살가운 둘째였다. 어머니는 그런 이인 님을 사랑했다. 하지만 사랑이 때론 버거웠다. 어머니의 사랑은 더 큰 기대를 동반했고, 기대는 이인 님의 마음을 힘들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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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자리를
만들어가다

이인 님은 집에서 가까운 중학교에 입학했다. 처음에는 중학교의 분위기가 낯설었다. 그러던 중 기회가 되어 수련회 장기자랑에서 1인극을 선보였다. 연극적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 좋았다. 이 무대로 뮤지컬부 선생님의 눈에 들어 부원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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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처음 무대에 등장할 때는 살짝 ‘쟤 뭐하냐’ 이런 분위기였어요. 근데 끝나고 나서 분위기가 되게 좋은 거예요. 뮤지컬부 선생님이 저를 데리러 오고. ‘너 이인이 이리로 와라, 뮤지컬부.’ 그래서 뮤지컬부에 들고. 그다음 학교 축제에는 나갈 생각이 없었는데, 제가 제일 좋아하는 선생님이 말씀하시더라고요. ‘축제에 나오는 건 다 춤이나 노래뿐인데, 밥상에 풀 반찬만 있으면 되겠냐, 고기반찬도 있어야지’. 그 말 들으니까 확 끌리는 거예요”

직접 봉사 동아리를 만들어 활동하기도 했다. 봉사 활동을 다니는 것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감각이 좋았다. 그전에는 학교에 ‘내 자리’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무대에 서는 일이나 봉사 동아리를 꾸려나가는 일은 의지를 펼칠 수 있는 기회이자 학교 생활을 버티게 하는 단비와 같았다.

“뭐 동아리라는 게 학교 교과 중에 곁다리지만 ‘내가 뭔가를 만들고 싶고 하고 싶어 하면 정말로 할 수 있구나’라는 그 자체가 되게 좋은 감정이었던 것 같아요.”

사람들은 이인 님이 학교 생활을 즐겁게만 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여느 학생들처럼 ‘그래도 학교는 가야 하니까’, ‘다들 가니까’ 학교에 다닐 뿐이었다.

“사실 뭐 대부분의 학생들이 학교를 가고 싶다는 말을 하지 않잖아요. 그전까지는 그래도 학교를 가야 된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간 거죠, 뭐. 다 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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툭 밀려 떨어진 느낌

고등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무렵 교실 창가에서 봄바람을 맞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수학 선생님이 ‘왜 수업을 안 듣냐’며 나무랐다. 주변을 둘러보자 교실은 이미 난장판이었다. 그때 생각했다. ‘왜 나한테만 이러지?’ 서러움이 밀려왔다. 선생님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애써온 이인 님에게 그 한마디는 비수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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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되게 한순간이었는데 기대받는 것에 대한 부담? 이렇게 열심히 버티고 서 있는데 갑자기 누가 툭 밀어서 떨어진 느낌이 들었어요. 그때 눈물을 조금 흘렸어요. 애들이 다 ‘왜 울어, 왜 울어’ 하니까 눈물이 더 나는 거예요. 수학 선생님이 앞에 어이없는 표정으로 서 있고.”

이인 님은 그길로 교무실에 찾아가 담임 선생님에게 자퇴하겠다고 전했다. 예기치 않은 결정이었지만, 설익은 판단은 아니었다. 그 결정 뒤에는 학교에 대해, 자신에 대해 고민해온 시간이 있었다. 하교 후 부모님에게도 자퇴하겠다고 알렸다. 부모님은 한 학기만 다녀보고 결정하자고 제안했지만 학교는 이미 견딜 수 없는 곳이었다. 자퇴 선언 이후 한결 자유로워졌다. 더는 선생님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 전에는 상상도 못한 일들을 거리낌 없이 할 수 있다는 게 즐거웠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자신이 내린 선택의 무게를 견뎌내야 했다.

“아마 자퇴 선언한 초반이었는데. 또 이걸 뒤로 돌아가기도… 지금까지 살아온 모습과는 너무 다르니까 그러면 안 될 것 같은 거예요. 그때 난 그냥 가만히 서있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계속 고민했어요. 머릿속으로. 그러다 보니 계속 눈물이 나더라고요. 진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고, 근데 확실한 건 학교에 돌아가기는 죽어도 싫다, 그랬던 것 같아요.”

고등학교 1학년 1학기가 끝나기 전에 자퇴했다. 검정고시를 봐서 대학에 갈 계획이었다. 독서와 글쓰기를 좋아해 문예창작과에 진학하고 싶었다. 하지만 갑자기 찾아온 우울증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 시기에 여러 사람에게 내면의 이야기를 털어놨지만, 마음의 짐을 완전히 덜어줄 이는 없었다. 온전한 쉼이 필요했다.

“그냥 조금 온전히 쉬고 싶은 느낌? 외부 환경적으로도 내적으로도 온전히 편안한 상태로 있고 싶다는 느낌? 이러면 안 된다고 스스로를 괴롭혔고, 어쨌든 부모님도 ‘걱정’이라는 말로 저를 굉장히 힘들게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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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어지기로 결심하다

집은 온전한 쉼을 누릴 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이인 님에게 더 큰 사랑을 바랐고, 기대는 무거운 짐이 됐다. 평생 어머니의 기대에 부응하려 애쓰며 살게 될까 두려웠다. 그래서 어머니에게서 멀어져야겠다고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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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은 그런 적이 있어요. 엄마가 바깥에 빨래를 널고 들어오신 거예요. 그때 엄마가, ‘우리 아들이 어릴 때는 엄마 햇빛 알레르기 있다고, 더우니까 여름에 수건 이렇게 들고 뒤에서 햇빛 가려줬다’는 얘기를 하시는 거예요. 그 얘기를 들으니까 딱 그냥 이미지가 떠올랐어요. 내가 평생 그렇게 햇빛 가려주면서 살 수도 있겠다. 평생 엄마 뒤에서 수건 들고 살 거 같다는 느낌이 든 거예요. 되게 무섭더라고요.”

이인 님의 생일날이었다. 어머니가 청소를 부탁했다. 생일인 만큼 동생에게 청소를 시키면 안 되겠냐고 했다. 하지만 어머니와 동생은 못 들은 척 했다. 이인 님은 화가 나서 방에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어머니가 방문을 두드리며 케이크를 사왔으니 같이 먹자고 했다. 참고 있던 화가 터져 나왔다. 케이크를 엎어버리고 한참 동안 난동을 피웠다. 그런 자신을 제지하려고만 하는 어머니의 모습에 더 화가 났다.

“케이크도 엎고 그러다가 조금 진정이 되고 나서 집을 나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엄마랑 같이 있으면서 지금처럼 계속 잘해줄 순 없으니까, 내 상태도 그렇고 엄마도 그렇게 안정적인 상태가 아니니까 엄마랑 좀 멀어져야겠다. 그게 가장 큰 요인이었던 것 같아요. 단순히 이런저런 상황에서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어요.”

이인 님은 어머니도 자신도 서로 기대하는 바를 채워줄 수 없다고, 그렇기 때문에 서로 멀어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화가 채 풀리기도 전에 짐을 싸서 나왔다. 지인의 공간에서 며칠 지내다 서울로 올라왔는데, 아직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집을 구할 수 없었다. 일단 애인의 친구네서 며칠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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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립 생활을
시작하다

이인 님은 나이를 속여가며 어렵사리 고시원 방을 구했다. 난생 처음 갖게 된 ‘나의 공간’이었다. 비록 애인을 편히 초대할 수도 없고 공동 생활의 불편함을 감수해야 했지만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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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첫째 형만이 방을 혼자 썼다. 누구도 의견을 묻지 않았고, 아버지는 방을 갖지 못해 화가 난 이인 님을 용돈으로 달래기 바빴다. 고시원에서 4개월 정도 지냈을 무렵 애인이 자신의 집에서 함께 살 것을 제안했다. 그곳에서 3~4개월쯤 생활하다 관계가 나빠지면서 나왔다. 집을 구할 형편이 안 되어 부모님 집에 잠시 머물렀다. 그러다 다른 애인을 만나 동거하다가 한 달만에 다시 나왔다. 불안정한 생활이 이어졌지만 곁에 이인 님을 있는 그대로 봐주는 친구들이 있었다. 그들과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생각을 강요하지 않고 서로를 인정하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러면서 위로를 얻기도 하고 생각도 정리할 수 있었다. 스무 살이 되어 집을 구할 수 있게 되자 모아둔 돈으로 원룸을 구했다. 집을 구하는 일은 어렵고 무서웠지만 띵동의 도움을 받아 해결했다. 비로소 독립적인 공간을 갖게 된 이인 님은 마음이 편해졌다.

“사실 이전까진 집이 없는 느낌이잖아요. 애인하고 좋은 집에 살았다고 해도 그 집은 내 집이 아니고 사실 집주인은 걔니까. 고시원도 단체 생활을 하니까 내가 (자유를) 온전히 누릴 수가 없잖아요. 좀 시끄럽게 하고 떠들고 하는 거에 대해서. 잠자는 것도. 그런 걸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너무 마음이 편했어요.”

최근에는 새로운 집으로 이사했다. 집 근처에 사장이 친절한 편의점이 있다. 일을 하면서 친구와 함께 일본어 스터디도 하고, 연기 수업도 들으며 하루하루를 바쁘게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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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의 의미를
고민하다

떠나온 집은 온전한 사랑을 주지 못했다. 이인 님을 있는 그대로 안아주지 못했다. 본가에서 나와 머문 곳들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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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살 수 있는 곳. 누구나 집에서 미친 짓을 하잖아요. 노래를 이상하게 부르기도 하고 그냥 막 혼잣말도 하고. 혼자서 춤도 추고. 그리고 저는 가끔 소리를 질러요.”

이인 님에게 집은 ‘가장 나다울 수 있는 공간’이다. 누구의 시선도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곳, 어떠한 모습도 받아들여질 수 있는 곳이다. 그런 집을 찾아 본가에서 나왔던 것이다. ‘나다울 수 있는 집’을 찾기까지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했다. 그 과정에서 이인 님이 한결같이 품고 있던 바람은 독립된 공간을 갖고 싶다는 것이었다.

“저는 사실 나라에서 이걸(주거권을) (보장) 안 해주는 것보다도, 사람들이 이걸(주거권을) 인정해주지 않는 게 더 슬픈 것 같아요.”

부모님 집을 나선 이후 법적인 제약 때문에 성인이 되기까지 자기만의 공간을 가질 수 없었다. 전에는 자기만의 공간을 갖지 못하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일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어려운 과정을 지나온 이인 님을 슬프게 하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자기만의 공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인정되지 않는 현실이다.

특정한 수식어로 자신을 해석하려 드는 사람들의 섣부른 시선 또한 이인 님을 슬프게 한다. ‘학교를 그만뒀기 때문에’ 혹은 ‘집을 나왔기 때문에’로 시작하는 이야기가 무섭다. 모든 전제와 꼬리표를 떼어놓고 자신을 봐주길 바란다.

“어떤 사람이 탈가정을 했기 때문에 어떤 시선으로 봐야 한다. 저는 그것도 무서운 얘기인 것 같거든요. 예를 들면 ‘탈가정을 했는데 그게 뭐 어때서’, ‘탈가정은 했지만 나쁜 애는 아니야, 좋은 애야’ 하는 것도. 조심스럽게 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어떤 사람을 탈가정이라는 기준점을 갖고 보는 것부터가 선입견이라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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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라도 위로를 건네는 삶

“사실 다 마음가짐의 문제잖아요. 진짜 아무것도 없어도 행복한 사람이 있고 많이 가져도 스스로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고. 이게 좀 무섭죠. 내가 어디까지 채워져야 행복하다고 느끼고 괜찮고 좋은 삶이라고 느낄까, 이걸 모르겠어요. 좋은 삶의 기준점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겠어요.”

계속

이인 님에게 좋은 삶이 무엇인지는 아직 명확하지 않다.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 있는데, 다만 누군가에게 위로를 건네는 사람이 되고 싶다. 멀리서라도 아픔을 들어주고 힘이 돼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저는 자우림을 되게 좋아하는데 자우림은 보통 김윤아 씨가 작사·작곡하니까... 그분은 저를 모르겠지만 저는 그분을 안다는 생각이 들잖아요. 이 사람은 나한테 아무 말도 안 했지만, 이 사람이 내 아픔을 들어주고 위로해준다는 감정을 느끼잖아요. 내가 모르더라도 누군가에게 위로가 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면 좋겠다, 그런 생각이 많이 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