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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순화 님의 이야기

경계에서 돌보며 거듭하여 나아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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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삶 | 꿈

그냥 내가 히고 싶고 보람을 느끼는 부분, 그리고 가치가 있다는 부분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지금 하는 활동을 하면서 즐거운 노년, 이제 60으로 가고 있으니까. 행복하고 즐겁게 노인으로 살아가지 않을까 싶어요.

생김새가 다르고 한국말도 잘 못한다는 이유로 엄마나 아빠를 우습게 여기거나 창피해하는 이주민 가정 아이들이 많다. 그런 아이들도 부모가 모국어를 쓰는 걸 보면 ‘엄마도 잘하는 것이 있네!’ 하고 자랑스러워하며 생각을 고쳐먹는다. 안순화 님은 그와 같은 모습에서 착안해 이주여성 언어·문화 배움터인 ‘생각나무BB센터’를 설립했다. 2009년 자조 모임으로 출발해 지금까지 중국, 몽골, 태국, 베트남 등 28개국 출신 이주여성들의 ‘친정집’ 역할을 해오고 있다.
중국 하얼빈에서 동네 유일한 조선족 가정의 넷째 딸로 태어난 순화 님은 일찍부터 많은 것을 혼자 힘으로 해결해야 했다. 그때만 해도 한국에서 삶을 꾸릴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한국행을 결심한 때는 2003년, 한국인 남성과 두 번째 결혼을 하면서다. 몸을 움직여 노동하는 것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지만 이주 초기엔 언어 장벽 탓에 어려움이 많았다. 이웃 할머니를 따라 노래 교실에 다니며 한국어를 조금씩 익히다가, 이주여성인권센터에서 운영하는 강좌를 통해 본격적으로 파고 들었다.
한국어 공부 중 이주여성 상담원 모집 공고에 지원해 상담 근무를 시작했다. 일을 잘했는데, 더 잘하고 싶어서 이주민 인권 강의까지 수강했다. 순화 님이 가정폭력 피해를 입은 내담자에게 공감할 수 있었던 이유는 본인 또한 그러한 일을 겪었고, 벗어난 경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한없이 순한 사람이었던 남편은 술만 마시면 다른 사람이 됐다. 날이 갈수록 심해지다 도를 넘어선 남편의 주취 폭력에 순화 님은 2007년 이혼을 결정한다. 다운증후군 장애를 가진 막내를 홀로 돌보는 일이 힘겨웠지만 특유의 완강한 기운으로 자립을 이뤄낸다.
상담사 활동을 하면서 자신과 비슷한 사례를 반복적으로 마주하며 자주 좌절감을 느꼈다. 그리고는 피해여성 혼자만의 노력으로 상황을 바꾸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남편, 시부모, 주변이 변해야 했다. 이를 위한 좋은 방법을 고민한 끝에 연극 공연을 기획하기로 했다. 이름하여 ‘샐러드 극단’으로, 다양한 배경의 이주여성이 모였다. 함께 대본을 쓰고 극을 준비했다. 각자가 다 이야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진짜 우리 이야기”였다. 공연을 본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다. 순화 님은 엄청난 보람을 느꼈지만 극단이 소속되어 있던 사회적 기업의 사정으로 공연은 지속되지 못했다.
50대인 현재, 생각나무BB센터 일에 변함없는 열정을 쏟고 있다. 12년이 넘도록 해왔다는 사실에 자부심이 크지만, 귀화를 했음에도 여전히 ‘비한국인’으로 바라보는 시선 탓에 사회 활동에 제약이 있다. 요즘 고민은 고3인 딸의 입시와 장애가 있는 고1 막내의 진로다. 순화 님에게 좋은 삶이란 “지금처럼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삶”이다. ‘엄마’로서의 책임감, 그리고 이주여성 친구들의 존재로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함께 웃으며 서로 지지하고 돌보는 관계의 힘으로 이 땅을 일궈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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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부터 자립심을 키우다

안순화 님은 1965년, 중국 하얼빈에서 6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넉넉하지 않은 가정 환경에서 성장하며, 나이가 꽤 들 때까지 자신이 “주워온 자식”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형제들과 닮지 않은 것 같고 주변 어른들이 농담이랍시고 장난을 쳤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자신을 향한 가족들의 무관심이 가장 큰 이유였을 것이다.

많은 식구가 함께 먹고 살아야 하는 가난한 시절이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어도 지금까지 서러움을 안고 있다. “애기가 애기를 업고 다닌다”는 말을 들으며 어린 동생을 업어 키웠는데 고등학생 때는 돌봐줄 사람이 없는 어린 동생을 데리고 학교 소풍에 가기도 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순화 님은 많은 것들을 혼자서 해야 했고 일찍부터 독립심을 키웠다. “주워왔더라도 밥만 주면” 괜찮다고 생각하며.

순화 님 가족은 동네에서 유일한 조선족이었다. 집에서는 무조건 “우리말”을 사용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진 아버지가 한국어를 쓰게 했으나 잘 되지 않았다. 오빠와 언니는 조선족 학교에 다니며 한국어를 배웠지만 조선학교가 없는 동네로 이사를 가면서 순화 님이 한국어를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사라졌다. 집에서 먼 곳에 기숙사가 있는 조선학교에 잠시 다니기도 했으나 한국어를 전혀 몰라서 적응하지 못하고 동네로 돌아왔다. 이때만 해도 “비행기는 국가 주석이나 타는 것”이었고, 중국을 떠나 한국에서 삶을 꾸릴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다른 조선족 사람들과 달리 소수민족 억양을 띠지 않는 중국어를 구사하였기에 딱히 차별받은 경험도 없었고 한족 친구들과 잘 어울려 지냈다. 학교에서도 두루두루 잘 지내는 학생이었다. 학교 행사를 준비하는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곤 했는데, 친구들과 놀기 위해서였지만 집에 늦게 들어가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그러나 모든 가족 구성원이 순화 님에게 냉담했던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순화 님을 유독 아꼈고, 순화 님도 그런 아버지를 따르고 좋아했다. 아버지는 화물트럭을 모는 운전사로 지방 출장이 잦았는데 가까운 곳에 다녀올 때면 순화 님만 데리고 다녀오곤 했다. 글씨를 잘 쓰는 아버지에게 번체자 쓰는 법을 배워서 친구들에게 가르쳐주기도 했다.

“위에 언니, 오빠 있고 밑에는 남동생, 여동생이 있고 제가 중간에 끼어 있으니까 새것을 얻어 입지 못했어요. 근데 지금 말하면 엄마가 ‘아니라고, 너 생각 잘못했다’고. 그러니까 아빠한테는 잘 보이려고. 아마 아빠도 느낀 것 같아. 토요일, 일요일에 학교 안 가고 하니까, 가까운 데 어디 시골에 출장 나가는 일이 있으면 그 전날에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 하면서 저를 데리고 갔어요. (...) 그런데 저 잃어버려도 누구도 찾는 사람이 없어요. (웃음)”

“제 아버지가 5살 때 할머니 할아버지를 따라서 경상도에서 중국으로 이주해 갔으니까. 중국에서 다 간체자를 쓰잖아요. 그런데 아버지는 번체를 썼어요. 간체 글자 보면 별로 안 예쁘잖아요. 번체 글자는 뭔가 있는 것처럼, 진짜 예술 글자처럼. 그런 글자를 써요. 그래서 제 아버지가 집이 조금만 좋았으면 뭔가 했을 분이라는 느낌이 들어요. 재미로 아버지한테 그 글자를 많이 좀 배웠어요. 그러니까 지금은 번체 글자 봐도 신기하지 않고, 학교에서 새해 카드에 번체 글자를 써가지고 친구한테 주고 그래서 친구들도 저한테 배우고 그랬어요.”

순화 님은 어린 시절 환대받지 못하는 가정 환경 속에서 자신을 알아주고 챙겨준 아버지에 대한 짙은 그리움이 남아 있다. 아버지는 폐암으로 돌아가시기 전 투병 중에도 순화 님에게 각별히 의지했다. 담배를 좋아하는 아버지를 기쁘게 하고자 담배를 말아준 일을 지금도 후회한다.

“담배는 몸에 나쁜 것도 모르고 아버지가 담배도 마는 담배를 피워요. 그냥 담배는 비싸서 안 피우는 거를 모르고, 아버지는 이거 좋아하구나. 그래서 학교 갔다오면 아버지한테 잘 보이려고 제가 담배 몇 개를 말아줘요. 지금 생각해보니까 그러면 안 되는데 제가 오히려 아버지 담배 많이 피우게 만든(게 아닌가).”

“발견했을 때 이미 폐암 말기여서 딱 3개월 (더 사셨어요). (...) 3개월 동안 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간병을 계속 저를 찾고. 엄마가 옆에서 약을 주면 독을 준다고, 나보고 죽으라고 한다고 누구도 약을 줄 수가 없었어요. 제가 약을 주면 믿고 먹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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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역 사업을 꿈꾸다

대학생이 된 순화 님은 중국 개방화 물결의 영향으로 개인 사업자가 늘고 있던 당시 상황에 따라 경영학과에 진학했다. 어릴 적 꿈은 변호사였지만 좋아하던 드라마 속 여성 사업가의 모습이 멋져서 생각이 바뀌었다. 학과 공부를 하는 동시에 관심을 갖고 있던 의류 관련 공부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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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께 옷을 만들어주기도 했는데, 일이 고되다는 것을 알고 업으로 삼겠다는 마음을 접었다. 그러나 그때 배운 미싱 기술 덕분에 이후 장애가 있는 막내 아이에게 안전한 장난감을 만들어줄 수 있었다. 졸업을 앞두고는 세무서에서 실습했다. 1년 후 정식 채용 제안을 받았지만, 세무서를 둘러싼 유흥 문화나 부패한 환경에 적응할 수 없어 그만두었다.

“어릴 때 동네에 우리 옆집에만 티브이가 있었어요. (...) 그때는 일본 드라마가 유행이었어요. 지금은 한국 드라마가 유행이지만. 그 집 가면 작은 걸상이 있는데 거기 앉아서 변호사 그런 쪽의 드라마를 보기 좋아했어요. 꼭 변호사 되겠다 그래서 집에서도 언니 오빠들이 제가 무슨 일이 있으면 판단력이 강하다고. 저한테는 변명을 못 하겠다. (웃음) (...) 그런데 후에 크면서 법대는 힘들구나. 그리고 이제 그때 중국이 개방하니 개인 사업자가 생기기 시작해서 마침 여자 마케팅하는 아가씨, (중국) 드라마가 있었어요. 와 너무 멋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냥 경영을 배워가지고, 이제 나 사업해야 해. 변호사 안 해.”

20대 중반, 순화 님은 첫 번째 결혼을 한다. ‘시댁에 잘해야 한다'는 아버지의 말씀을 따라 회사를 다니면서도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대가족의 집안 살림을 챙겼다. 막 태어난 아이를 보고 남편의 조카와 형제들, 시어머니를 돌보는 일도 순화 님의 몫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의 외도를 목격하고, 그것을 방조하고 두둔하는 시어머니에게 큰 배신감을 느낀다. 결국 이혼을 택했지만 그 후 전남편은 아는 친구들을 동원해 순화 님의 마음을 돌리려 했다. 그런 모습이 가식적으로 보이고 너무 싫었다. 순화 님을 꾸준히 “귀찮게 했던” 이 일들은 이후 한국행을 결심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당시 중국은 막 개방이 시작되던 시기였고, 순화 님 역시 이러한 변화를 따라 무역 사업을 하길 원했다. 먼저 한국의 노래방 기계를 중국으로 수입해 중국 전역에 도매하는 회사에서 일을 시작했다. 자신이 일하는 회사에서 들여온 노래방 기계가 중국 전역으로 판매된다는 사실에 매우 뿌듯했다. 그때 한국 노래를 많이 들었다.

“주현미의 짝사랑. 그다음에 현철. 그때 저희 언니 오빠가 한국에 왔다 갔고 CD를 가져오고 해서 한국에 이런 가수들이 있구나 알게 된 거죠. 그런 노래를 많이 들었는데. 그다음에 한국에 와서 이제 장윤정의 ‘어머나’ 노래. 2003년에 왔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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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행을 결심하다

2000년대 초반, 순화 님은 두 번째 남편을 만난다. 당시 중국과 한국을 오가며 사업을 하다가 사기를 당해 세무 관련 문제가 있던 한국인이었다. 순화 님은 지인의 소개로 그에게 도움을 주게 됐다. 그렇게 맺은 인연으로 2년여 동안 편지를 주고받으며 연애를 했다. 그와 결혼하면서 순화 님은 한국에 가기로 마음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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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결합을 요구하며 자신을 괴롭히던 전남편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마음과 함께 중국을 오가며 무역 사업을 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당시 순화 님은 옷 가게와 방과 후 교실, 슈퍼 겸 문구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이 일을 모두 정리해야 했기 때문에 결정이 쉽지 않았지만, 한국어를 배우고 새롭게 펼칠 무역 사업에 대한 기대를 갖고 한국행을 결심했다. 한국에 처음 왔을 때 기억이 생생하다. 밤에 도착한 탓에 어두워 주변을 잘 둘러보지 못했는데, 다음날 아침 옥탑방 문을 열고서 마주한 풍경이 마음에 들었다.

“아침에 (나가보니) 옥상인데. 중국에서 아파트 살다가 이런 데 사니까 너무 좋잖아요. 문만 딱 열면 완전히 옥상 다 내 거고. 그냥 너무 좋은 거예요. 환기도 잘되고, 햇빛만 나면 이불이며 다. 너무 신났어요. 월세인지도 몰랐어요. 혼인 신고 할 때 그런 서류가 필요하잖아요. 그런데 그때는 한국어 모르니까 집 계약서인지 모르고 ‘그냥 이 사람 이름으로 집이 있구나’. 중국에서처럼 생각했죠. 중국은 월세든 전세든 내 집이라고 절대로 말 안 하거든요.”

중국에서는 자기 소유의 집만 ‘나의 집’이라 부르기 때문에 한국에 올 때 남편에게 ‘집’이 있는 줄 알았다. 그러나 남편이 마련한 집이란 옥탑방 월세였다. 같은 건물에 살던 집주인이 옥상 사용을 제한하거나, 자주 들러서 간섭할 때도 그냥 이상하게 생각했을 뿐 한참 후까지 그 사실을 정확히 알지 못했다. 아이를 둘 낳고 기르기에 편안한 환경은 아니었지만 한국에서의 첫 보금자리였기에 소중했다. 남편이 출근하고 나면 매일 조금씩 동네를 탐색하며 활동 범위를 넓혀갔다. 이웃 할머니를 따라 노래 교실을 다니며 한국어를 조금씩 익히기도 했다.

“아랫집 할머니가 저 매일 집에 있으니 가자고. 어디 가는가. 노래 교실. 할머니 할아버지들 노래 교실에 한 2년 동안 다녔죠. 거기 가서 ‘어머나’ 노래 듣고. 아 진짜 귀찮았어요, 그때는. 제가 젊으니까 계속 저한테 말을 거는 거예요. 할아버지들 담배 냄새 나고 하는데 계속 옆에 와 말 걸고. 대답하기도 싫고 그렇지만 묻는데 대답 안 할 수도 없고 간단하게 한국어 잘 모른다 조금 이야기하고 그러다가 나중에 생각하니까 그분들이 고마운 거죠. 한마디라도 저한테 걸어 줬으니까 제가 조금 더 빨리 배운 건 아닌가 싶어서. 또 재미있었어요. 할머니 할아버지들 막 이렇게 (춤추고) 진짜 쑥스럽고. 저 사람들 몇 살이지? 그냥 노래만 하면 되지. 왜 저러지. 할아버지들인데 좀 점잖아야지 그랬는데. 한국 문화를 이제 조금 배우고 하니까. 그게 맞다. 신나서 강사들 따라다니더라고요. 도시락 싸서. 저보고도 도시락 싸오라고. 왜냐하면 노래를 오전에 가르치고 그 강사가 오후에 다른 데 가르치러 가면 거기에 또 따라가요. 가자고 해서 한 번 따라간 적은 있어요.”

순화 님은 남편에게 자신은 한국에 가서 반드시 일을 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남편이 그에 동의했기 때문에 한국행을 결정했을 정도로 중요한 문제였다.

“나는 일은 해야 된다. 절대로 나는 집에만 있으면 안 된다고. 그거 동의해가지고 와서. 그래서 이제 한국어 공부하고, 구인 정보 보고 남편이 전화해가지고 휴대전화에 뭐 좀 붙이는 그런 공장에 또 몇 개월 다니다가. 도저히 완전 사람을 너무 무시해가지고 그래서 거기 안 다니고 그다음에 중국어 가르치기 시작한 거죠.”

그러나 언어 장벽 탓에 이주 초기에 할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었다. 이후에는 다운증후군 장애가 있는 아이를 돌보느라 정작 야심차게 계획했던 무역 일에는 도전하지 못했다. 남편의 도움이 전혀 없다시피 한 상황에서 아이들을 혼자 돌보면서 동사무소 복지사, 특별히 인근 복지관의 도움을 크게 받았다. 장애 관련 정보를 잘 찾기 위해 어르신을 대상으로 한 주민센터 강좌에서 컴퓨터도 배웠다. 그러던 중 이주여성인권센터를 만나면서 새로운 활동 영역으로 관계가 확장되고 든든한 기반을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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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여성 상담사로 일하다

한국에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한국어 공부를 위해 글자가 적힌 전단지를 줍던 중 이주여성인권센터*에서 운영하는 한국어교실 광고를 발견하고 찾아갔다. 이곳에서 한국어를 배웠을 뿐 아니라 새로운 사람들을 만났고, 일자리를 얻었다. 이후에는 제안서 작성과 같이 활동을 시작하기 위한 준비를 하는 공간이 되었다. 이제는 “친정”과도 같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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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2003년에 한국에 왔는데 그때는 다문화센터가 없고, 한국어교실이 없었잖아요. 없으니까 이제 어디 가게 되면 전단지를 주워서 공부했는데. 돈 내서 공부해야 한다는 것도 솔직히 말해서 그때는 몰랐어요. 물론 돈 낸다 하면 남편이 주지도 않겠지만. (...) 전단지 처음에 주워서 중랑구청에 컴퓨터교실이 있었어요. 무료 컴퓨터교실. 그래서 그거 들고 가서 컴퓨터는 구청에서 배우고, 그다음에 이 전단지를 들고 이주여성인권센터 찾아가서 한국어를 공부하기 시작한 거예요.”

한국어 공부를 하던 중, 여성가족부에서 최초로 이주여성 상담원을 모집하는 것을 보고 참여했다. 상담원 교육을 받은 후 이주여성긴급지원센터에서 상담 근무를 시작했다. 일을 잘했고, 열심히 했다. 폭력 피해를 겪고 있는 내담자에게 자신의 사례를 얘기해주면서 용기를 주기도 했다. 일을 더 잘하고 싶어서 성공회대학교에서 이주민 인권 강의도 찾아가서 들었다.

“그때 진짜 열심히 했어요. 상담 건수도 제일 많고 내담자들이 고맙다고 막 선물도 주고. 제가 나왔는데도 선물 전달하겠다고 그쪽으로 전화해서 개인 연락처를 받으려고 하는 분도 있었어요. (...) 저는 그냥 최선을 다한 거죠. 어떤 친구가 도저히 그 자리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으면 내 개인 상황도 이야기해주면서 어떻게 극복해야 된다 그런 것도 알려주고 하니까. (...) 상담을 3년 반 정도 했는데 정말 나 같은 인생은 없는 것 같애. 내담자가 암만 힘들고 어찌 해도 정말 나처럼 이렇게 힘든 사람은 없는 것 같아요.”

* 이주여성이 한국사회 구성원으로서 인간의 기본 권리를 보장받고 당당히 설 수 있도록 돕는 비영리 민간단체. 2001년에 한국 최초의 이주여성쉼터인 ‘여성이주노동자의 집’으로 출발. 2005년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로 명칭 변경. 현재 전국에 6개 지부, 6개 이주여성쉼터와 2개 이주여성상담소 운영 중.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는 폭력과 차별로부터 이주여성의 인권을 보호한다. 이주여성 스스로가 문제 해결 주체가 되어 또 다른 이주여성을 도울 수 있도록 교육과 역량 강화의 기회를 제공. 이주여성이 평등하게 살 수 있도록 정부 정책을 모니터링하고 정책을 연구, 개발, 제안해 변화를 이끈다.” (출처: 이주여성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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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립하다

순화 님이 가정폭력 피해를 입은 내담자들에게 공감할 수 있었던 이유는 본인 또한 그러한 일을 겪었고, 벗어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남편이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술을 마신 모습은 정반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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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초, 술을 마시기 시작하는 것을 보며 순화 님은 아이가 없어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 둘을 낳아도 남편의 알코올 의존은 심해지기만 했다. 순화 님에게 폭력을 가하거나 위협하는 일이 잦아졌다. 중국의 가족들과 연락하는 것을 못마땅해하며 전화선을 자른 일도 있었다. 순화 님은 심한 불안감을 느꼈다. 잠을 잘 못 자고 출근하느라 몸이 많이 망가졌다. 집안 곳곳에 칼 자국이 생길 정도로 큰 위험에 처했던 순화 님은 이혼을 결정한다.

“잘 때 베개 밑에다 칼을 두고 자고 그러니까 잠을 못 자는 거예요. 어떻게 자요. 이주여성긴급지원센터에 출근하고 있을 때인데, 2006년에 입사해서 낮에는 상담하고 해야 하는데 밤에 잠을 못 자고 불안한 거야. 조금만 소리 나면 깨야 하니까. 머리가 깨끗할 때가 없었어요. 두피가 진짜 두껍게 막 일어나고. (...) 경찰 수도 없이 불러오고 그 후에는 무슨 일 있으면 휘발유를 가지고 오는 거예요. 라이터를 딱 옆에 두고 한마디만 더 하라고. 더 하면 너 죽고 나 죽는다고. 도저히 이제 그때는 무서워서 감히 살지를 못해서 2007년에 이혼을 한 거죠.”

집을 나온 순화 님은 이사 갈 곳을 구할 때까지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이주여성 동료의 집에서 잠시 지냈다. 이후 구청을 통해 LH 전세대출금 500만 원을 받아 지하방을 구했는데, 그곳의 환경은 매우 열악했다. 창문도 없었고, 화장실을 이용하려면 계단 6개를 올라가야 했는데 볼 일을 볼 때 허리를 펼 수가 없었다. 영화 〈기생충〉에 나온 반지하와 굉장히 비슷하다고 느꼈다. 전남편은 막내 아들에 대한 친권과 양육권을 달라고 순화 님에게 요구하며 그렇지 않으면 이혼에 합의하지 않겠다고 주장했다. 전남편이 아들을 돌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순화 님은 양육권을 주고 이혼했다. 예상대로 전남편은 일주일 후 아들을 순화 님에게 보냈다. 이후 중국에 계셨던 어머니가 한국을 방문해 쭉 머무르게 되면서 현재까지 함께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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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여성의 삶을
말하는 연극과
모임을 만들다

콜센터에서 상담사 활동을 하면서 반복되는 가정폭력 문제를 마주하며 좌절감을 느낄 때가 많았다. 피해여성 혼자만의 노력만으로는 상황을 바꾸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피해여성만이 아니라 남편과 시부모를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상담을 명목으로 초대해봤자 거부하거나 당일에 나타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좋은 방법이 없을까 고민한 끝에 모든 가족들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연극 공연을 기획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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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샐러드 극단’이라는 이름하에 연극을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다양한 배경의 이주여성들이 모였다. 함께 대본을 만드는 작업부터 시작했다. 자신이 겪은 일들을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하면서 공통적으로 공감대를 형성한 내용을 공연으로 구성해냈다. 이들은 생계 노동과 연극 준비를 병행하며 갖은 고생을 하면서도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순화 님은 공연을 본 가족들이 이주여성으로서 사는 삶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눈물 흘리며 공감하는 모습을 보고 엄청난 보람을 느꼈다. 그러나 공연은 이어지지 못했다. 극단이 소속되어 있던 사회적 기업에 지원금이 끊기면서 이전처럼 월급을 받으며 일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즈음 순화 님은 이주여성들의 자조 모임을 만들었고, 2009년 10월 1일 정식으로 출범했다. 시작할 때 모임의 이름은 ‘엄마 나라의 언어‧문화 배움터’였다. 그런데 아이들이 차별받을까 두려워 본인의 출신을 숨긴 엄마들이 단체 이름 때문에 아이들을 데려오기 어려워하는 걸 보면서 지금의 ‘생각나무BB센터’로 이름을 바꿨다. 이주민 가정 아이들이 엄마 혹은 아빠를 우습게 여기거나 창피하게 생각하고 존중하지 않는 걸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을까 생각하다 설립한 단체다. 이주민 여성 스스로 자존감을 되찾아 우리 힘으로 우리 아이들을 지켜야 한다고 결심하고, 그 방법으로 언어와 문화 교육을 떠올렸다. 아이들이 엄마가 모국어를 쓰는 모습을 보고 “엄마도 잘하는 것이 있네!” 하며 자랑스러워하는 모습에서 착안한 활동이다. 연극으로 만들었던 내용 중 이러한 내용이 많이 나왔기에 친구들과 의기투합해서 모임을 일단 시작했다. 연극은 한 번으로 끝났지만 이후 오래 이어질 모임의 단단한 계기가 됐다. 생각나무BB센터는 단순히 교육만 이뤄지는 공간이 아닌 중국, 몽골, 태국, 베트남,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러시아, 스위스, 볼리비아 등 28개국에서 온 이주여성들의 ‘친정집’과도 같다고 말한다.*

* 25개국에서 온 이주여성들의 ‘친정집’, 생각나무BB센터 (출처: http://womenfund.or.kr/archives/support/25개국에서-온-이주여성들의-친정집-생각나무bb센)

50대인 현재, 순화 님은 생각나무BB센터 자원 활동에 여전히 많은 시간을 쏟고 있다. 어느덧 12년 넘게 이어져온 이 활동에 대해 뿌듯함과 자부심이 크다. 그러나 그간 여러 곳에서 표창을 받을 만큼 활동을 인정받았음에도 정작 실질적인 후원은 받기 어려운 탓에 시간을 더 쓰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중랑구에서 20년 가까이 살았고, 귀화를 했음에도 여전히 ‘비한국인’으로 바라보는 시선 탓에 사회 활동에 제약이 있다.

“저는 중국어 강의하고 통번역 이런 거 해서. 그래도 제가 여기에 있는 시간이 더 많아요. 그래서 친정 엄마가 ‘야 너 센터에 가 있는 시간으로 (다른 거 하면) 뭐라도 성공하겠다’. (웃음)”

“다른 지인들이 소개해서 후원하겠다고 이미 이야기된 건데, 저하고 이야기하면 그냥 없어지는 거예요. 딱 한마디 해요. ‘거기에 한국 실무자 있는가.’ (...) 그냥 후원하는 사람들이 한국 사람이면 믿고. 저 한국 사람이에요. 이주해서 한국 국적 취득했기 때문에. 잘 인정을 안 해주더라고요.”

“제가 중랑구에서 18년 살아서 중랑구 토박이라고. ‘어디서 왔어요?’에 ‘중랑구’라고 하면, ‘아니~!’ 이런 차별이 항상 있더라고요. 그래서 ‘나 중국’ 하면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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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삶

순화 님은 중국에서 한국까지 경계를 넘나들며 생존을 위해 다양한 대응을 고민하며 살아왔다. 생계와 가족 부양을 위한 경제 활동을 끊임없이 해오며 동시에 아이들을 지극정성으로 돌보았다. 그 덕에 아이들은 건강하게 잘 자랐고 여느 가족처럼 때로는 투닥거리면서 지내고 있다. 요즘에는 고3인 딸의 입시에 대한 고민과 장애가 있는 고1 막내의 진로에 대한 고민이 크다.

계속

순화 님은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배우고, 자립을 위해 노력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과 비슷한 어려움을 겪는 이주여성들과 연대하며 함께 삶을 만들어가는 활동가로 거듭났다. 살아오면서 어려운 상황을 여러 번 마주했지만, 문제 해결력과 진취적인 태도로 현재의 삶을 이뤄왔다. 그런 순화 님에게 좋은 삶이란 “지금처럼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삶”을 의미한다. 이렇게 여러 가지 일을 해올 수 있었던 원동력은 ‘엄마’로서의 책임감, 그리고 이주여성 친구들의 존재다. 진심으로 걱정해주고, 함께 웃으면서 서로 지지하고 돌보는 관계 속에서 앞으로의 삶 또한 일궈나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