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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 님의 이야기

나와 우리가 손잡고 나아간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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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삶 | 꿈

제가 너무 그 동안 마음에 공간이 없어서. 막 그냥 살다가 청소하면서 창문을 보는데, 바람은 불고 비행기는 지나가고 하늘은 맑고... 좋은 삶이란 이런 게 아닐까... 자유로운 그런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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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 시절,
마냥 견디다

아리 님은 1990년대 후반에 대구에서 태어났다. 아주 어렸을 때 부모님이 이혼했고 어머니, 새아버지와 원룸에서 살았던 것이 최초의 기억이다. 대구에 살 때 예닐곱 살쯤 배가 고파서 누가 집 앞에 버리고 간 초코송이 과자를 주워 먹은 일이 유난히 기억에 남는다. 지금 생각하면 웃기고, 슬픈 기억이다.

아리 님은 어머니와 새아버지에게서 적절한 돌봄을 제공받지 못했고 심지어 성적 학대로 볼 수 있는 일을 겪기도 했다. 당시에는 그 경험이 어떤 의미인지도 모를 만큼 어렸지만, 나이가 들고 나니 기억이 해석되면서 고통스럽고 괴로웠다.

어머니는 7살이 된 아리 님을 경기도 부천의 아버지 집으로 보냈다. 그곳에서 아버지, 조부모님, 오빠, 언니와 살게 됐다. 어머니와 지낸 시간이 딱히 좋지도 않았기 때문에 헤어진다고 해서 슬프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아리 님과 언니를 때렸다. 중국집에서 요리와 배달을 하던 아버지는 술을 많이 마신 탓에 뇌종양으로 쓰러졌고, 수술을 받은 이후에도 계속 술을 마시며 고정된 일자리 없이 지냈다. 언니는 아버지가 술을 마실 때마다 폭력적으로 변하는 것을 두고 아리 님을 탓했다. 식당에서 일하며 생계를 책임지던 할머니, 그리고 별다른 일을 하지 않던 할아버지는 상황을 방관할 뿐이었다. 집에 방이 세 개였고 아버지와 언니, 아리 님이 셋이서 한 방을 써야 했다. 부천에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중학생이 된 언니가 가출하고 나자 방에는 아리 님과 아버지만 남았다. 아버지의 폭력으로부터 안전한 공간도, 기댈 사람도 찾지 못한 채 그 시간을 견뎌내야 했다. 당시 다니던 초등학교에서 왕따를 당한 경험이 있다. 청결에 대한 보살핌 없이 지내다 보니 제대로 씻지 못해 머리에 이가 생겼고, 이 사건으로 1년 동안 반 친구들과 관계를 형성하지 못했다.

“제가 무관심 속에서 살아왔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씻는 방법을 모르겠는 거예요. 사실 ‘씻어야 되는 건가?’ 그런 것도 없었고. 머리도 그냥 일주일에 한 번 감고 그랬는데, 그래서 결국 이가 생겼고, 학교에서 친구가 머리에 이 있는 걸 본 거죠. 그 뒤로 일 년, 한 학년 동안 왕따당하다가 그 이후에 씻어야 되는구나, 알게 돼서 머리도 감고 그랬고.”

아버지는 종종 만취 후 새벽에 귀가해 잠든 아리 님을 깨워서 안마를 강요했다. 너무 졸려서 거부하면 폭행이 뒤따랐고, 그러다가 아침이 되어 등교하곤 하다 보니 피곤함이 가시지 않는 생활이 반복됐다. 아버지가 아리 님을 폭행할 때면 할머니는 문을 잠그고 상황에 개입하지 않았는데, 그런 태도가 큰 상처로 남았다. 아버지는 아리 님이 친구들과 놀거나 밖에 나가지도 못하게 했다. 할머니의 소개로 5년 정도 방과 후 지역 아동 센터에 다니며 친구들과 나름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센터의 복지사 선생님에게 도움을 구하고자 아버지의 가정 폭력 사실에 대해 이야기했다. 선생님은 아리 님을 상담사와 연결해줬다. 그러나 상담사는 실제적인 대안을 제시해주지 못했는데, 폭행을 저지른 사람이 아닌 아리 님과의 상담으로는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을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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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가출하다


아리 님은 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으로 자살을 시도했고 이후로도 자해에 가까운 시도를 몇 차례 이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의 폭력을 견디며 살다가는 “정말 죽을 수도 있겠다 싶어서” 처음으로 집을 나왔다. 어떤 준비도 하지 못한 채 갑자기 뛰쳐나와 무작정 친구 집으로 피신하는데 “너무 신났”고 “입꼬리가 내려가지를 않”을 만큼 “그 집을 나왔다는 자체가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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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나올 때는, 아빠한테 맞다가 이대로는... 아빠가 집을 나가라고 했나 그랬을 거예요. 나간 다음 몇 시간 뒤 들어오라고 하면 들어가서 혼나고 그러는 거 있잖아요. 근데 나가라고 했을 때 밖에 서있다가 ‘알겠습니다’ 하고, 그때 겨울이었는데, 잠옷이니까 반팔에 반바지 입고 있었는데, 그 상태로 신발도 못 신고 막 뛰었어요.”

그 뒤로 아버지의 폭력을 피해 짧게 가출하는 일이 잦아졌다. 친구 집, 놀이터, “아는 사람” 집에서 숙박을 해결했는데 이때 “아는 사람”은 거리에서 알게 된 성인 남성을 말한다. 당장 집 밖에서 머물 공간과 생활비가 필요했기에 안전하지 않은 관계 안으로 들어가게 됐는데 그곳은 곧 성폭력에 취약한 공간이기도 했다.

“이상한 사람들이나 그냥 아저씨들, 할아버지들 있는데... 가출을 하면, 아니 가출이 아니고 밖에서 놀면 그런 사람들이랑 자주 어울렸어요. 왜냐면 뭐 술도 사주고 담배도 사주고 하니까, 같이 어울리다가 졸리면 그 사람 집 가서 자기도 하거나. 같이 드라이브 가거나, 그때는 그냥 그렇게 많이 놀았죠.”

“일단 먼저 집이 가장 필요했고. 그리고 생활비? 돈? 사실 집이랑 돈만 있으면 학교도 굳이 집에서 본집에서 안 다녀도 되고 있는 집에서 다닐 수도 있는 거고, 일자리도 급하게 알아보지 않고 천천히 하고 싶은 거 생각해서 해볼 수 있는 건데, 그 두 가지가 없다 보니 성급히 앞서 나가려 하다 보니 그렇게 된 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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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시트를 만나다

그러던 아리 님은 중학교 1학년 때 부천역에 아웃리치를 나온 엑시트* 버스를 만났다. 친구가 아리 님을 데리고 안전한 곳을 찾아 “도망치듯” 간 데가 엑시트 버스였다. 그날 아리 님은 환대받았고, 이후 금요일마다 부천역에 오던 엑시트 버스에 매주 찾아가 함께 밥 먹고 수다 떨고 힘든 일도 이야기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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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는 별다른 취미나 좋아하는 대상이 딱히 없었기 때문에 집을 나와 친구들과 노는 것만이 유일한 낙이었다. 그나마 좋아하는 과목은 미술이었다. 그림 그리기에 소질이 있기 때문이다. 요즘도 마음이 복잡할 때 낙서하듯 그림을 그리면 마음이 편안해지곤 한다. 본인은 “머리를 안 써도 되”기에 좋아한다며 겸손하게 말하지만, 엑시트에서 활동하면서 센터를 소개하는 만화나 드로잉 작업으로 그림 실력을 인정받기도 했다. 부천 바깥으로 아웃리치를 갈 때 함께 열심히 준비하며 활동가들의 격려와 응원을 받은 일은 여전히 쑥스럽고 기분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상황에서 그나마 좀 버틸 수 있었던 곳이 아닐까 싶은. 그 뭐지 비상구잖아요. 저의 탈출구. 그런 존재였죠, 엑시트는.”

“엑시트가 (저녁) 8시부터 열었는데 시작하기 1시간 전부터 앞에서 일을 하다가, 그때 아마 새벽 2신가 3시에 끝이 났거든요. 2시 반쯤. 이제 끝나면, 거기 앞에 롯데리아가 있거든요. 그럼 거기 앞에서 활동가들 회의 끝날 때까지 기다리다가, 뭐. 잘 가라고 인사하고 또 저희는 또 저희끼리 놀러 갔거든요.”

*“움직이는 청소년센터 EXIT는 버스를 기반으로 한 아웃리치로 거리의 청소년들을 만납니다. 청소년들이 거리에서 처한 혹은 처할 수 있는 위기 상황을 안전하게 넘어서 각자의 다양한 삶으로 자립하고 존엄한 삶을 유지하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합니다. 또한 청소년들이 사회적 구성원으로서 존중받으며 살아갈 수 있도록 버스를 중심으로 지역사회와 함께 청소년 인권이 보장되는 환경을 만들어 나가고자 합니다.” (출처: http://wahaha.or.kr/ex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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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도 학교도 떠나다

중학교 3학년이 된 아리 님은 이번에는 엑시트 활동가의 응원과 도움으로 나름의 준비를 한 뒤에 탈가정을 감행했다. 탈가정 청소년 쉼터를 거쳐서(그룹홈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쉼터를 거쳐야 하기에) 안산에 있는 그룹홈에 들어갔다. 네다섯 명이 함께 지내고 선생님 한 분이 상주하는 구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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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부천을 떠나 안산까지 간 이유는, 부천 친구들과 떨어져 지내면서 열심히 공부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끔 외박을 허락받고 부천에 가면 결심이 금세 무너졌다. 새 학교에 적응을 하지 못해서 외로웠고, 외박 이후에 그룹홈으로 돌아가지 않는 날이 늘었다. 그룹홈에는 여러 규칙이 있었는데 그중 낮 시간에 등교하지 않으면 집에 머무르지 못한다는 것도 있었다. 학교에서 친구를 사귀지 못하고 혼자 지내던 아리 님은 등교하지 않는 날이 늘었고, 낮에 주민 센터 컴퓨터실을 배회하며 시간을 때웠다. 부천에 가고 싶은 마음만 커질 뿐이었다.

결국 그룹홈에서 나와 아버지 집으로 돌아갔고 이후 쉼터에 들어갔다 나오기를 서너 차례 반복했다. 쉼터 생활 중 가장 힘든 건 규칙이 셀 수 없이 많다는 점이었다. 몇 가지를 기억해보면 이렇다. 휴대폰을 걷어 갔고, 쉼터에서 만난 친구와는 함께 외출할 수 없었고, 저녁을 먹고 싶지 않아도 식사 자리에 앉아있어야 했으며, 원치 않는 프로그램에도 의무적으로 참여해야 했고, 흡연 횟수나 시간도 정해져 있었다. 별 실효성이 없거나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 규칙도 잔뜩 있었다. 결국 쉼터에서 쫓겨났지만, 그곳에 머무는 동안 자립 훈련 매장인 카페에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 중학생 때 전단지 나눠주는 아르바이트를 하긴 했어도 본격적으로 일하기 시작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고, 그 카페는 지금의 직장이 됐다.

고등학교는 친구 집에 머물면서 3개월 정도 다니다가 그만뒀다. 오빠와 언니 모두 자퇴했는데, 할머니는 아리 님만큼은 대학에 갔으면 하는 기대를 품고 있었다. 그런데 아리 님이 몰래 자퇴서를 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할머니는 집을 아예 나가라고 했다. 지난날을 돌이켜보면 원래 공부나 대학에 관심이 없었다기보다, 공부에 집중할 수 있는 상황이나 조건을 전혀 갖추지 못했기에 자퇴하기로 결정했던 것 같다.

“그때는 사실 (공부에) 관심이 없어서 자퇴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만약에 상황이 좀 좋았다면, 많이 욕심이 났을 거예요. 지금도 뭐,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은 많이 들고. 그때는 그냥 지금 공부를 하지 못하는 상황이니까. ‘난 원래 공부 싫어해서 그런 거지’라고 혼자 다독였던 것 같아요.”

“친구 집에서 같이 지내면서 등하교를 하는데, 좀 생활이 안 좋게 됐죠. 교통비도 없고 눈치도 보이니까.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학교를) 그만두게 됐고, 만약에 그냥 뭐 친구 집에서 계속 다녔다고 하더라도, 중학교 시절부터 제가 생활비 지원을 받지 않는 상태였는데 일단 생활비도 벌어야 되잖아요. 다른 애들은 다 핸드폰도 있고 다 버스 타고 등교하고. 그런 친구들의 모습과 제가 계속 비교가 되니까 이제 다닐 수 없겠다는 판단을 하고. 그리고 좀, 나는 공부가 어쨌든 싫으니까, 그래서 안 한 거잖아 하고 저를 딱 단정지어서 그때는 그렇게 생각을 했죠.”

“교복을 제가 사야 했는데, 비싸잖아요. 그런데도 할머니는 돈을 주지 않으실 게 분명히 보이니까… 그전에도 준비물을 사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할머니가 이해를 못 하시고 엄청 화를 낸 적이 있거든요. 그때 저도 할머니한테 너무 화가 나서 집 나가겠다고 하고 짐 싸서 나간 적도 있고. 그런 일이 몇 번 있다 보니까 이제 말하는 게 좀 꺼려지고 하니까. 그래서 아마 그 교복을 샀을 때도 사실, 그전에 알던 사람들, 안 좋은 사람들한테 부탁을 해서, 암튼 돈을 벌어서 그렇게 생활을 했거든요, 사실. 아, 내가 이렇게까지 학교를 다녀야 되나? 그래서 그냥 그만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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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집에서
자립을 준비하다

쉼터에서 얼마간 지내다 쫓겨난 뒤 친구 집에 살던 아리 님에게, 마침 사정을 알게 된 자립 훈련 매장 선생님이 ‘청소년 자립팸 이상한 나라(속칭 ‘앨리스집’)’*를 소개해줬다. 소수 인원만 거주할 수 있는 조건이라 자리가 나기를 기다려서 마침내 입주(‘입국’)했다. 그곳에서 지낸 2년 중에 처음 1년은 “거의 놀고 먹고, 떼쓰고 징징거리”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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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안전한 공간을 갖지 못해 억눌러온 온갖 감정과 기억이 밀려들었다. 함께 사는 친구와 활동가들과 끝없는 대화를 시작해 자신을 이해하고 표현하며 삶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마음의 준비를 거쳤다. 안산 그룹홈에 살 때와는 다르게 부천 친구들이 그립지 않았다.

“거기 있던 활동가한테 화내고 울고. 그분한테 너무 미안하지만 감정을 쏟아내는 일을 1년 동안 했고, 그리고 남은 1년은 이제 자립을 하기 위한 준비를 서서히 조금씩 하게 됐죠.”

“제가 과거에 살던 시절이, 제가 잘못된 건 아니고 그 사람들이 잘못했다, 그것도 사실 몰랐는데 앨리스집에 들어오고서 이제 안정이 됐고요. 활동가들도 그 사람들이 잘못한 거지 뭐 네가 잘못한 건 아니다, 그렇게 수시로 많이 알려줬어요.”

“(앨리스집에서는) 외박하는 사람이 생기면 신기할 정도로 저희끼리 완전 재미있게 놀았어요. (...) 규칙은 저희끼리 정하는 거라, 그냥 뭐 내가 살면서 불편한 것들을 막 얘기하는 회의 시간에. 그래서 (규칙을) 정하긴 하는데, 뭐 해봤자 외박을 하면은 걱정되니까 그냥 알려줘라, 카톡방에. 그것밖에 없었죠, 사실. 그리고 아, 청소. (...) 좀 자유로워지니까 집에 있고 싶더라고요."

아리 님에게 자립이란 두 가지를 갖췄을 때 가능한 것이다. 바로 “혼자 살아갈 수 있는 힘”, 그리고 “함께 살아갈 수 있는 힘”이다. 그 둘을 갖추는 시간을 앨리스집에서 차곡차곡 쌓았다.

“혼자 살아갈 수 있는 힘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힘, 이 두 가지가 생길 때. 그때 자립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 일단 함께 살아가려면 믿음과 의지가 필요해요. 믿음도 있어야 되고, (서로 의지하면서) 이제 나의 고민을 얘기하기도 하고, 상대방 고민을 들어주기도 하고, 함께 해결하기도 하고. 근데 또 너무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어쨌든 내가 해결할 수 있는 선에서는 해보고. 그렇게 두 가지 다 병행하면서 합쳐질 때.”

스무 살이 되어 앨리스집에서 ‘출국’한 아리 님은 친구들과 반지하방에서 동거하기도 하고 언니에게 신세지기도 했으나 어느 쪽도 편안하지 않았다. 이후 LH청년임대주택에 혼자 거주하게 되면서 비로소 안정적인 생활로 접어들었다고 여긴다. “나의 집이 있으니까 내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평일에는 8시간 일하고 퇴근한 뒤 게임하다가 잠들고, 주말에는 소소한 취미 생활을 즐기는 일상을 보낸다. 앨리스집에서 낯선 친구들과 서로를 깊게 이해하며 받아들인 경험, 그리고 이웃들과 일상에서 소통하며 지낸 경험이 아리 님에게는 이상적인 ‘공동체 생활'의 모델로 자리잡았는데, 현재 생활하는 곳에 그런 교류는 없다는 점이 아쉽긴 하다. 혼자 살면서 식사는 자주 배달 음식(빨리 배달되고 빨리 먹을 수 있는 메뉴 위주로)으로 해결하는데, 같은 건물에 왕래하며 지낼 사람들이 있다면 배달 음식도 나눠 먹고 반찬도 만들어서 나눠 주고 싶다. 무엇보다 마음이 힘들 때 가까이에서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공간과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 “‘청소년자립팸 이상한나라’는 18세~24세 여성 청소년들이 사는 주거공간입니다. 탈가정 청소년의 주거권 보장을 고민하며 2014년에 만들었습니다. 자립팸은 청소년들에게 ‘이것저것 해보고 싶은 집’,‘고정된 규칙이 아닌 움직이는 관계가 있는 집’, ‘두발 뻗고 맘 편히 쉴 수 있는 집’, 그리하여 ‘살고 싶은 집’이 되고자 노력합니다.” (출처: http://wahaha.or.kr/eesanghannara) 움직이는 청소년센터 EXIT와 같은 사단법인 들꽃청소년세상에 속한 사업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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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운 마음으로 일궈가는 삶

아리 님이 생각하는 좋은 삶은, 방 창문에서 올려다본 푸른 하늘의 이미지로 표현된다. 그간 여유란 것을 갖기 힘들었던 마음에 드디어 바람이 통하고 햇볕이 내리쬐는 순간 자유로움이 체감되며 좋은 삶을 그려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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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너무 그동안 마음에 공간이 없어서 막 그냥 살다가, 청소하면서 창문을 보는데, 바람은 저에게 불고 비행기는 지나가고 하늘은 맑고... 기분이 뭐랄까. 붕 뜨는 기분이라서, 좋은 삶이란 이런 게 아닐까... 약간 자유로운 그런 삶?”

가끔 엄습해오는 두려움은 지금의 안정된 삶이 지속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에서 비롯한다. 앞으로 또 다른 힘든 고비를 겪을까 두렵고 가까운 이들과 갈등을 겪을 때 불안감이 더욱 커진다.

“지금 가장 무섭고 두려운 것은, 지금 삶이 너무 안정되고 편안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힘듦이 또 찾아올 때 내가 또 어떻게 변할지 무섭고, 그런 상황이 오면 받아들이고 노력해야 하는데 그것조차 하기 싫을 것 같기도 하고. 평범한 삶이 불쑥 무서운 거 같아요. 힘들 거면 계속 힘들면 되는데, 좋은 삶을 제가 이제 갖고 있잖아요? 그걸 계속 유지하고 싶어서 평범한 삶이 무서운 거 같아요.”

“한번은 친구랑 싸우게 됐는데, 그러고 집에 와서 뭐랄까... 집에서 혼자 술을 더 먹었기 때문일 수도 있어요. 싸우면 사람으로부터 미움을 받은 거잖아요. 그게 무섭고 마음이 되게 아프더라고요. 그래서 자살 방지 센터에 전화를 해서, 내가 힘든 산을 너무 많이 넘어왔는데 끝이 보이지 않고 나는 산을 넘어갈 힘이 없는 것 같다고 이야기를 했다가, 다음 날 술 깨고 일어나서 바로 후회하고 (웃음) 그랬죠.”

그렇지만 과거에 힘들었던 일들을 덤덤하게 이야기해내는 자신을 보며, 이제 전부 지나간 시간에 속할 뿐이라는 생각도 든다. 한편 내 집, 내 일처럼 일상을 이루는 구체적인 요소들과, 과거와는 다른 행동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로운 마음”이 단단한 뿌리가 되어 아리 님의 현재를 지탱해준다.

“과거의 힘듦이 아직 남아있지만, ‘정말 정말 옛날 일이구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힘듦의 연속이 많았지만 지금 너무 잘 살고 있다는 생각도 들고. 이런 얘기를 할 때도, 옛날에는 좀 많이 무겁고 말을 하기가 너무 어렵고 나를 어떻게 볼까 걱정도 많았는데, 지금은 이리 말하고 나니 내가 많이 무던(해지고) 많이 치유가 됐나?, 하는 생각도 들고 그래요.”

“내 집, 내 일도 있고, 내가 나쁜 행동, 나쁜 생각을 하지 않아도 살 수 있고. 착하게 살고 싶으면 착하게 살아도 되고, 그런 자유로운 마음으로 살 수 있구나, 하는 현재도 있고.”

아리 님의 어릴 적 꿈은 웨딩드레스 디자이너였다. 소중하고 특별한 날에 단 하루 입는 옷을 만들어보고 싶었다. 지금은 컴퓨터와 관련한 일을 하고 싶다. 이것저것 만드는 취미가 있어 먼 훗날 소품 숍을 차리고 싶기도 하다. 결국에는 ‘손’으로 무언가를 해내면서 도전하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한다. 더욱 깊어진 마음과 두 손으로 “도전하는 삶”을 충실하게 일궈가고자 한다.

“사실 제가 꿈이 없고, 없을 예정이거든요. 왜냐하면 제 생각에 꿈이란 항상 변하는 거라서. 제가 한 개 다짐한 게 있다면, (꿈이) 변할 때마다 도전하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거예요. 어쨌든 하려면 손으로 무언가를 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