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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 님의 이야기

온전히 나다운 삶을 위한 날갯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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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삶 | 꿈

하루를 마무리하고 잠자리에 누웠을 때 하루를 되짚어 볼 마음의 여유를 가진 삶이 좋은 삶 같아요. 요즈음 제 삶을 보면 어느 순간 마음이 조급해질 때가 있고,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잠자리에 들 때도 있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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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저리 떠돌다

신선 님은 1993년 전라북도 익산에서 태어났고 2살 터울의 형이 있다. 생애 최초의 기억은 어머니의 손을 잡고 유치원에 가던 길이다. 한참 자라고 난 뒤, 돌 무렵 아버지의 사업 실패가 원인이 되어 부모님이 이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러니까 기억 속 어머니의 손은 사실 새어머니의 손이었던 것이다. 한참 돌봄을 받아야 할 영유아기에 여러 번 어머니가 바뀌는 경험을 했다.

누군가 어머니라는 자리에 들어왔다가 얼마 안 가 떠나면 형과 함께 할머니 손에 맡겨지는 일이 반복되면서 누구와도 안정적인 애착 관계를 쌓기가 어려웠다. 새어머니들에게 따뜻한 사랑을 받은 기억이나 기분 좋은 추억 하나 없다. 할머니는 유독 형만 편애했고 신선 님은 무섭고 엄격하게 대했다.

7살 무렵 가족과 함께 전주로 거처를 옮겼고, 이후 가족 구성원이 바뀔 때마다 계속해서 이사를 다녔다. 어머니 자리가 빌 때마다 할머니가 돌봐줬다. 그러다가 9살 되던 해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면서 갈 곳이 없어졌다. 아버지는 형님 댁에 자식들을 맡아달라고 부탁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렇게 되니까 저희를 돌봐주실 분이 없는 거예요. 처음에는 아빠가 저랑 저희 형 짐을 싸서 친척 집으로 보냈어요. 큰집으로 보냈는데, 아마 큰집이랑 소통이 잘된 것 같지는 않아 보였어요. 벨을 누르니까 당황해하시더라고요. 일단 들여보내서 맛있는 거 먹이기는 했지만, 바로 다시 돌려보내셨어요. 하루 재웠나, 아니면 밥 먹이고 나서 돌려보냈고 저는 다시 아빠랑 집에 갔고. 아빠가 큰집과는 그때부터 연락을 끊었던 걸로 기억을 하고요.”

결국 아버지는 신선 님 형제를 지속적으로 돌봐줄 사람을 찾지 못해 보육원에 위탁하기로 결정했다. 보육원으로 가게 된 줄도 모른 채 잠들어있던 어느 날 밤, 아버지가 신선 님과 형을 안아주며 하염없이 울던 모습, 그리고 다음 날 짐을 꾸려 어디론가 데려가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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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사람들과
함께 지내다

보육원에 도착하자 학교 같은 건물 몇 채와 강당, 그리고 축구 골대가 눈에 들어왔다. 그때까지도 그곳이 어디인지 몰랐고 마냥 낯설기만 했다. 아버지를 보니 또 울면서 서류를 쓰고 있었다. 다음 순간 낯선 어른들이 다가와 신선 님과 형을 어디론가 안내했고 아버지는 일주일 뒤에 데리러 오겠다는 말만 남긴 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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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일주일이 지나도 데리러 오지 않았지만, 더 나중에 특별한 날이면 찾아와 같이 시간을 보내고 용돈을 쥐어주기도 했다. 새어머니가 생기면 함께 형제를 만나러 오기도 했다. 아주 어렸을 때는 아버지와 함께 살고 싶은 마음이 컸어도 별다른 원망은 하지 않았다. 가끔이라도 아버지가 보러오는 것만으로 무척 좋았다. 한참 크고 나서 그때의 아버지를 떠올리니 때로 원망스러웠다.

보육원은 이전에 본 적도 없는 사람들과 단체로 생활하며 매일매일을 공유해야 하는 곳이었다. 13명쯤 되는 아이들이 한 반을 이뤄 방 네 개와 화장실 하나를 나눠 썼고, 각자의 자리를 만들기 위해 저마다 눈치껏 적응하며 살았다.

“군대처럼 그런 식으로 했던 거죠. 단체 생활이다 보니까, 밥 먹기 전에 새벽 5시 반쯤 모여 인원 체크하고 아침 청소하고 밥을 먹고 저녁에는 9시쯤 모여 인원 체크하고 잠드는 일과의 연속이었죠. 선생님들은 청소하고 행정 업무 하고 상담 일지도 쓰고 방 청소도 해주고 빨래도 돌리고 하셨는데, 저희가 다 된 빨래를 널고 누울 자리 이불은 각자 정리하고 그런 역할을 자연스럽게, 뭔가 눈치껏 했던 것 같아요.”

그래도 형과 함께 있어 익숙지 않은 생활에 조금은 위안이 됐다. 처음에는 서로 다른 방을 써야 했는데, 난생 처음 형과 떨어져 생활하는 환경이 견딜 수 없어 옆에 계속 붙어있었다. 그 모습을 본 선생님이 결국 형제가 같은 방을 쓰도록 허락해줬다. 형에게 의지하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아주 미미하게나마 편한 마음으로 보육원 생활에 적응해나갔다.

보육원에서 비슷한 환경에 처한 또래들과 사는 것은 작은 사회를 경험하는 것과 같았다. 선생님이 예뻐하는 친구들은 언제나 주목받으며 지냈지만, 귀염받지 못하는 친구들은 알게 모르게 조금씩 배제되는 느낌이었다. 시설은 모두의 요구를 무조건 받아줄 수 없다는 것, 그리고 규율로 구성원을 통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신선 님은 잘 알고 있었다. 이런 환경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허용보다는 거절의 경험을 먼저 익히게 되고, 한정된 기회를 놓치는 경험을 너무 많이 겪는 탓에 ‘기대’나 ‘꿈’ 같은 단어를 품고 살아가기가 쉽지 않다. ‘나는 배제된 사람이구나’라고 느끼는 경험만 자꾸 쌓이다 보니, 어떤 좋은 지원 제도를 소개받아도 ‘해도 안 될 거야’라는 태도를 먼저 보이는 경우가 많다

신선 님은 무리에서 뛰어나게 공부를 잘했고, 선생님 눈 밖에 나지 않도록 솔선수범하며 모범생처럼 생활해 보육원에서 귀염을 독차지했다. 그러나 선생님에게 귀염받을수록 친구들과의 관계는 단절돼갔다. 불편하고 괴로운 감정이 불쑥 튀어나오기도 했지만, 보육원 친구들과는 다른 삶을 만들어가고 싶었기에 꾹 참았다. 아니, 어쩌면 관계를 맺는 방법을 몰라서 서툴렀던 것일지도 모른다. 영유아기에 사랑과 신뢰라는 감정이 무엇인지 느끼지 못한 채 십 대 청소년이 된 탓에 타인과 관계 맺기에 어려움을 겪게 된 것이다. 누군가 곁에 있어 이야기를 나누고 관계 맺는 방법도 함께 고민했다면 좋았을 텐데, 주변에 그럴 만한 어른이 아무도 없었다.

“너무 서툴렀던 거예요. 그런 걸 알려 줄 사람도 없었어요. 선생님들에게 얘기하기도 조금 힘들었고요. 사춘기 시절에는 모든 판단과 결정을 온전히 제가 다 했어요. 기준도 없고 누구한테 물어보거나 할 수도 없고, 그냥 뭐 이렇게 하면 되겠지... 그랬던 것 같아요. 저희끼리도 경쟁하고 계급이 나뉘고 그런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도 잘 모르겠고, 조언을 해주는 사람도, 쉽게 이야기를 꺼낼 수 있는 사람도 없었어요. 그러니까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그런 고민이 있을 때 해결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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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그리고 내 꿈을
찾아 헤매다

자아 정체성을 확립해나가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소심하고 눈물 많던 어린 시절, 보육원에서 유난스러운 아이로 보이는 것이 싫어 선생님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행동만 하려고 했다. 다른 친구들이 삼삼오오 모여 담배를 피우거나 익살스러운 장난을 주고받는 모습을 보면 ‘난 저렇게 되면 안 돼’라고 스스로를 통제하면서 그들을 안타까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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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자신이 무엇을 잘하는 사람인지 몰랐고 주변에서 독려받지도 못했기 때문에, 학교에서 소위 ‘잘하는 그룹’에 속해 눈에 띄는 친구들의 행동을 무작정 따라하고 흡수하며 몸에 익히는 방식으로 자신을 성장시켜나갔다.

신선 님은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특히 사람이나 정물 그리는 것을 좋아해서 세밀하게 배우고 싶었지만, 보육원에서 보내준 미술 학원은 학교 성적과 관련된 그림만 가르치는 곳이었다. 보육원 선생님에게 구체적으로 무엇을 배우고 싶은지 이야기하며 학원을 옮기고 싶다고 하자 돌아온 대답은 “무엇이든 배울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준 것만 해도 감사해해라”라는 것이었다. 이후 바이올린이 배우고 싶어졌을 때 돈 때문에 말을 꺼내지 못했다. 학교 특별 활동 시간에는 볼링부처럼 참가비가 필요한 것은 제외하고 영화감상부처럼 무료로 참여할 수 있는 것만 선택하게 됐다. 하고 싶은 마음이 도전의 시작이라면, 그 마음마저 사치였기에 자신의 무한한 역량을 알아가기 위한 기회조차 만들지 못했다.

‘공부’는 신선 님을 지켜주는 특권과 같은 것이었다. 공부를 잘해야만 보육원에 무엇인가를 요구했을 때 들어주고 무한하지는 않더라도 원하는 것을 이어나갈 수 있을 만큼은 지원해줬다. 그런데 이런 상황은 늘 고민으로 이어졌다. 문제를 적극적으로 돌파해나가기보다 주어진 조건을 잘 활용할 방법만 찾는 것 같아 자꾸만 스스로를 돌아보게 됐다. 그때부터 ‘진정한 자립’이란 무엇인지 많이 고민했고, 지금도 여전히 답을 찾고 있다.

“특별 취급을 많이 받고 하다 보니까 저 스스로 그게 경계가 됐어요. 나중에 정말 나가서, 그러니까 (보육원에서는) 오히려 원하면 많이 얻어냈고, 그러다 보니까 내가 나가서 정말 잘 살 수 있을까? 뭔가 어렸을 때부터 끊임없이 지원을 받아오다가 이게 없어졌을 때 내가 혼자 자립할 수 있을까? 여기에 대한 고민이 많았던 것 같아요. (…) 지금도 그런 고민을 정말 많이 하는 것 같아요. 누군가 지원해주는 게 아니고서는 조금 더 적극적으로 잘 안 하려고 하는 것 같아요. 그 마음들을 경계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너무 그게 습관화가 되어버려서 결국엔 또 그렇게 돌아가더라고요. 수동적이게 되고 될 대로 되겠지, 늘 잘 됐으니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요리사의 꿈을 꾼 적도 있다. 보육원에서는 자체 필기 시험에 통과하는 사람만 조리사 자격증을 준비하기 위한 요리 학원에 보내줬다. 공부를 잘했던 신선 님조차 네 번의 시도 끝에 필기 시험을 통과했는데, 고등학교에 진학할 시점이 되어 실기 시험은 치르지 못했다. 요리사의 꿈은 그렇게 접고 공무원이 되는 것만이 인생을 평탄하게 만드는 길이라는 선생님 말씀을 따르기로 했다. 전보다 공부에 더 집중했고, 부족한 과목이 있으면 보육원에 지원을 요청하거나 친구들에게 배웠다. 그러나 공무원은 나의 꿈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장래희망이었다. 공부에 흥미가 생기지 않아 늘 그만두고 싶었다. 기술을 배우고 싶은 마음이 점차 커져서 보육원 선생님과 의논했지만, 미래를 위해 계속 공부해야 한다는 반응에 매번 새로운 도전을 내려놓고 현실에 맞춰 살았다. 대학 진학 후 저마다 꿈을 갖고 학교에 들어온 친구들을 보며 후회감이 조금씩 밀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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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숨기다

신선 님에게 학교는 나를 들키지 말아야 하는 공간이었다. 보육원 아이라는 라벨이 눈에 띄지 않도록 누구보다 바르게, 의젓하게 지내면서 착실히 공부했다. 중학교는 일부러 보육원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갔다. 가까운 학교에 다니면 사는 곳이 쉽게 드러날 것 같아 두려웠기 때문이다. 자신의 위치를 지키며 새로운 학교에서 만난 친구들의 생활 방식을 따라가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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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과 어울리기 위해, 보육원에서 지급하는 한 달 용돈 5천 원과 차비를 아끼려고 편도 3~40분 거리를 날마다 걸어서 등하교했다. 고등학교는 중학교보다 더 멀리, 더 좋은 학군이 있는 지역으로 갔다. 가난이 조금씩 드러나기도 했을 테지만, 스스로는 누구에게도 사는 곳을 밝히지 않은 채 한층 두꺼운 가면을 쓰고 다녔다. 한 예로 학교가 밤늦게 끝나면 선생님이 ‘보육원’이라고 써 붙인 차로 데리러 왔는데, 그것이 눈에 띌까봐 늘 정문에서 5분쯤 떨어진 지점에서 픽업해달라고 요청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채 다른 자아로 매일매일을 긴장 속에서 살았다. 그래서인지 지금까지 연락하고 지내는 중·고등학교 때 친구가 거의 없다.

나를 숨기는 동시에 우회적인 방식으로 드러냄으로써 나만의 영역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서였을까, 신선 님은 개성을 드러내고 관심받기를 좋아했다. 주된 표현 수단은 옷이었다. 사복을 입을 기회가 생기면 교복에 묻혀 있던 자아를 표출하기를 즐겼다. 친구들이 ‘옷 잘 입는 애’라고 불러주는 것도 좋았고 주목받는 것도 좋았다. 이런 경험으로 패션에 대한 관심이 날로 커져서, 형의 옷을 몰래 입기도 하고 다림질도 반듯하게 해서 깔끔한 차림으로 다녔다.

그래도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머물러도 괜찮은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틈틈이 혼자 사색하거나 공상하기를 좋아했고, 특히 걸어서 집과 학교를 오가는 길에 ‘내가 만약 부잣집 아들이었다면’, ‘내가 만약 보육원에 사는 게 아니었더라면’, ‘내가 만약 어떤 신기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같은 상상을 했다. 그러다 보면 오래 걷는 고됨을 잊을 수 있었다. 등하교하는 동안이 신선 님에게 주어진 유일한 자유 시간이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그 시간을 즐기기 위해 새로운 길을 탐험하기도 하고, 산을 타고 가는 경로를 알아내서 산 위에 올라 세상을 구경하기도 하고, 낯선 동네를 돌아다니기도 했다. 그 시간만큼은 남들에게서 벗어나 주도적으로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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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나눌
친구들을 만나다

수능이 끝나고 친구들이 하고 싶었던 일을 마음껏 즐기는 동안 신선 님은 곧장 생활 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등록금과 생활비를 벌기 위해 수능을 마친 직후부터 대학 생활 내내 쉴 새 없이 전쟁 치르듯 아르바이트를 했다. 보호 연장 허가를 받아 다른 친구들보다 늦게, 24살의 나이로 보육원을 퇴소한 이후 삶은 더욱 녹록지 않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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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중에 있는 돈이라곤 자립 정착금으로 지원받은 500만 원뿐이었다. 아무리 계산을 해봐도 1년을 버틸 수가 없었다. 걱정이 늘어갈 즈음 우연히 알게 된 동사무소 직원의 안내로 기초 생활 수급비를 받을 수 있었고,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낄 무렵 모 기업에서 운영하는 장학 재단을 알게 됐다.

장학 재단에서 경제적 지원을 받아 생활이 전보다는 안정됐다. 하지만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좋아하는 일을 찾아보려던 시기에 장학 재단을 통해 다양한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비슷한 상황에 놓인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꿈을 발견해 가꿔나가게 됐다. 밤새 술을 마시면서 보육원 생활 이야기에 서로 맞장구치기도 하고, 임대 주택 신청 방법 등 자립을 위한 구체적인 정보를 나누기도 했다. 그렇게 대화하는 동안, 혼자 품어온 이야기가 내면에 고립돼 묻히는 대신 비슷한 고민을 하는 친구들에게 전해져 공감대를 형성했고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되기도 했다. 속이 시원해지는 느낌이었다. 동시에, 남이 정해준 장래희망에 따라 살던 신선 님 안에서 뭔가 꿈틀대기 시작했다. 내 이야기를 통해 다른 사람의 삶에 좋은 영향을 주고 싶어졌고, 새롭게 나만의 삶을 만들어가고 싶어졌다. 그래서 블로그를 열어 생각을 표현하는 한편 SNS를 통해 자립 과정에서의 어려움이나 유용한 정보를 나누면서 보호 종료 청년들의 커뮤니티를 만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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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열어 보이다

대학에 가고부터 신선 님은 ‘진짜 나’를 찾아가는 여정에 들어섰다. 처음에는 대학 친구들에게도 마음을 열지 못해 불편하고 괴로웠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 어렵게 보육원 이야기를 꺼냈을 때, 친구들은 담담하게 받아들여줬다. 그러자 날 선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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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많이 울었던 것 같아요. 누군가에게 내 이야기를 해도 되는구나, 이렇게 다 꺼내놓아도 안전할 수 있구나, 처음으로 느꼈던 것 같아요. 그 후로 나에 대해 계속 이야기할 수 있었고, 그러다 보니 더 친해지는 것 같았어요. 이야기를 다 하고 나니 친구들도 더욱 신경을 써줬고요. 그리고 좋았던 것은, 친구들이 자기 부모님한테 제 이야기를 했다는 거예요. 친구들의 가족이 저의 존재를 안다는 것, 이게 좀 특별했어요. ‘뭐라고 말했는데?’라고 물으니 ‘오늘 학교에서 신선이 뭘 했는데, 그게 이렇고 저랬어’라고 이야기했다는데... 고등학교 때는 그런 경험이 없었거든요. 보육원에서는 이야기할 사람이 별로 없으니 입 다물고 있었고, 내 이야기에 공감해줄 만한 사람도 없었고. 대학생이 됐더니 친구들이 ‘내 동생이 신선이 너를 안다’라고 한다든지, 집에다 신선하고 여행 다녀오겠다고 하면 허락도 잘 해준다고 하고, 이런 이야기들이 제 마음을 좀 열어준 것 같아요.”

이런 경험을 하고서야 비로소 신선 님은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게 됐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갈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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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다운 삶'을
만들어가다

살면서 가장 좋았던 순간을 꼽자면 “남들이 좋다고 했던 것을 때려치웠을 때”다. 평생 안정적인 직장을 보장해준다는 직업을 갖기 위해 임용고시에 도전하려다 결국 그만두기로 하고 상경했다. 배우고 싶던 것들을 배우느라 매일매일 숨 돌릴 틈 없이 바빴지만, 자신이 지닌 다양한 가능성을 확인해볼 더없이 좋은 기회였으므로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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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립 전문가’가 되고 싶다는 지금의 꿈도 그 시기를 거치며 구체적으로 그려볼 수 있었다. 그때부터 내가 좋아하는 일, 할 수 있는 일, 하고 싶은 일에 집중하면서 새장에 갇혀있던 과거에서 벗어나 하늘 위로 자유롭게 날아오를 준비를 해나가는 중이다.

“저는 늘 사람 속에서 꿈을 찾고, 사람 속에서 해방감을 느끼는 것 같아요. 그리고 그 힘을 알기에 다른 사람들한테 흘려 보내주고 싶었어요. 그런 역할을 하기 위해 어렵지만 이 일을 계속해서 하는 것 같아요.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 혼자가 아니라고 느끼고, 함께 자립을 해나가는 과정에서 누군가를 돕고 또 계속 도움을 받고 있는 거예요.”

사람들 사이에서 늘 긴장하며 지냈던 어릴 적 모습과는 달리, 이제는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자신이 의미 있다고 느낀다. 가끔 머릿속이 복잡하고 힘든 순간이 와서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어지면 봉사 활동을 다니면서 사람들을 만나고 일에 집중한다. 이번 주에도 바쁜 일정을 다 소화해낸 뒤 숨 돌릴 틈도 없이 주말에 보육원 아동들을 대상으로 멘토링을 하러 간다. 그 시간이 에너지를 다시 채우는, 가장 기다려지는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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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나를
만날 수 있는 집

신선 님에게 집은 절실하게 필요한 공간이다. 하루를 돌아보며 나를 보살피고, 아무런 제약 없이 미래를 상상하며 거침없이 꿈꿀 수 있는, 모든 자립이 시작되는 나의 공간. 오직 나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곳. 먼저 그런 공간에 자리잡고서야 자유롭게 하늘을 비상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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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자신에게 충분히 집중하지 못했던 것을 후회하며, 이제는 ‘지금도 잘하고 있으니 눈치 보지 말고 하고 싶은 일 다 해’라고 스스로를 토닥여주고 싶다. 신선 님에게 집은 온전한 자아와 자유를 선물해주는 공간이다.

“저에게 좋은 삶이란, 하루를 마무리하고 잠자리에 누웠을 때 하루를 되짚어볼 마음의 여유를 가진 삶인 것 같아요. 요즈음 제 삶을 보면 어느 순간 마음이 조급해질 때가 있고,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잠자리에 들 때도 있더라고요. 그래서 지금부터라도 조급함을 조금 내려두고 다시 마음의 여유를 찾아보려고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