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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목 님의 이야기

배우고 가르친다는 것


*인터뷰는 수어통역을 통해 진행되었고, 직접 인용된 부분은 통역사의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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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삶 | 꿈

서울 정리하고 시골로 가서 사는 게 꿈입니다. 시골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산천의 그 모습이 지금도 선해요. 제가 농사를 짓지는 못해서 글 쓰면서 지내고 싶어요. 시인이 되고 싶었는데 시도 쓰면서.

마지막으로 들었던 소리는 새가 지저귀는 소리와 바람이 대기를 가르는 소리다. 아직도 머릿속에 그 떨림이 남아 있는 듯하다. 가끔 소리를 문자로 번역해주는 앱으로 새 소리, 바람 소리를 확인하며 그때의 감정을 떠올린다.
김수목 님은 9살에 청력을 완전히 손실했다.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11살이 되어서야 농학교에 다시 입학한다. 처음에는 수어로 말을 거는 아이들이 무서웠다. 차츰 적응하면서 수어로 대화하고 친구를 만들었다. 책 읽기를 즐겼고, 청각장애인을 가르치는 국어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꿈도 생겼다. 다양한 언어를 배우는 게 좋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학교 졸업 후 곧바로 부모 뜻에 따라 농인 남성과 중매 결혼을 하게 되면서 교사의 꿈을 접게 됐다. 그때 나이가 열아홉 살이었다.
“그냥 살았다.” 결혼 생활은 그렇게 말할 만큼 무감정했다. 아이를 둘 낳았는데, 소통이 어려워 친밀하게 교감하지를 못했다. 그러다 남편의 실수로 2,000만 원의 빚이 생기는 바람에 양가 사이가 틀어져 이혼하게 됐다. 당사자 둘의 의사는 중요하지 않았다. 양육권은 모두 가져왔으나 양육비는 받지 못했다. 공장에서 일하며 월급으로 20만 원을 벌어 3만 원짜리 월셋방에 살았다. 한부모로 두 아이를 키우는 게 “정말 죽고 싶을 만큼” 힘들었지만 자식 생각에 견뎌냈다. 그렇게 키운 아이들은 성인이 되자 무정하게도 연락을 끊었다.
40대에 자발적으로 택한 남자와는 사실혼 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그의 폭행, 위협, 사칭으로 고통만 남았다. 큰 부상을 입기도 했고 인간 관계까지 완전히 단절되어 심각한 우울증이 생겼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 중증장애인독립생활연대 대표만이 공감해주고 위로해줄 뿐이었다. 사건은 경찰의 협조 덕에 어렵게 재판으로 넘어갈 수 있었는데, 이러한 일련의 경험은 수목 님에게 생긴 일이 단지 개인적인 불운 탓이 아니라, 농인 여성이 겪는 구조적인 문제의 일환이라는 의식을 갖게 했다. 또한 법학 공부를 시작하는 계기도 됐다. 법에 대한 상식을 얻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때로는 사이버대학 수업에 수어통역이 제공되지 않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졸업까지 해냈다.
현재는 LH 임대주택에 혼자 살고 있다. 바람이 있다면, 재판이 끝나고 자녀들과 관계를 회복한 후에 함께 시골에 내려가 오래된 집을 수리해서 지내는 것이다. 태어나 자란 시골 산천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풍광을 눈에 담으며 고요히 살고 싶다. 시인이 되고 싶기도 했는데 그곳에서는 시를 써볼 수 있을 것 같다. 컴퓨터는 하지 못하니 오롯이 손으로 쓰겠다.

1

프롤로그

“그냥 모션으로만, ‘운전~’ 하면 운전하는 모션으로, ‘밥 먹어’ 하면 밥 먹는 모션으로 진행했어요. (그러면 엄마한테 친구 관계라든지, 학교 생활 이야기를 하고 싶으면 좀 많이 답답하셨겠어요.) 네... 말이 안 통하니까. 동생들하고도 소통이 잘 안 되고. 깊은 이야기는 못 했고.”

김수목 님은 1965년 충북 청주의 농촌 마을에서 태어났다. 집안 분위기가 몹시도 가부장적이어서 출생한 해에 곧바로 출생 신고를 하지 못하고 큰아버지 댁에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3년을 기다렸다. 이 일로 학교에 들어가는 시기가 늦어졌다. 부모님은 모두 농사를 지었는데 생활이 넉넉하지 않았다. 쌀독이 텅 비어 있어서 어머니가 큰집으로 보리쌀을 얻으러 갔던 날을 기억한다. 어머니는 농사일과 부엌일로 매일 바빠 수목 님을 제대로 보살피지 못했다.

세네 살 즈음이던 어느 날, 어머니는 수목 님이 소리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인지한다. 병원에서는 이미 청력 손실이 많이 진행되어 치료가 불가하다는 소견을 들었다. 9살에 홍역에 걸렸고, 가까운 병원이 없어 그대로 방치한 탓에 상태가 더 악화되어 청력을 완전히 손실하게 됐다. 집에서는 행동(모션)으로 간단한 의사소통만 하며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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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 터벅터벅
걸어다니다

수목 님은 늘 혼자였다. 동네에서는 아이들이 ‘벙어리’라고 놀렸고 친하게 지내는 친구도 없었다. 시골집 이웃들과 보냈던 시간이 기억나냐는 질문에 사람은 기억이 안 난다고 한다. 그저 개울가에서 가재 잡고 놀았던 기억이 조금 남아 있다.

계속

아주 어렸을 때부터 가족과도, 친구와도, 동네 이웃과도 소통을 전혀 못 하고 지낸 수목 님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이 세상에서 그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못한 채 스스로를 지키며 혼자 터벅터벅 걸었을 테다. 마지막으로 들었던 소리는 새 소리와 바람 소리다. 그 잔상이 아직도 남아 있어, 지금도 가끔 소리를 문자로 번역해주는 앱을 이용해 새 소리, 바람 소리를 확인하며 그때의 감정을 떠올린다.

밑으로 4명의 형제가 있는데, 수목 님을 포함해 3명이 어렸을 때 청각장애를 갖게 됐다. 엄마가 잘못 돌봐서 아이들에게 장애가 생겼다며 엄마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기억한다. 그러나 어린 자신에게 관심을 갖고 한글을 가르쳐주려고 했던 것, 그래서 이후 교사라는 직업을 꿈꾸게 해준 아버지를 향한 고마움 또한 존재하기에 아버지를 떠올리면 복잡한 감정이 든다. 아버지에게 글자를 배울 땐 학용품도 마땅치 않아서 땅에 나뭇가지로 글자를 쓰면서 익히곤 했다.

“종이가 없어서 모래 땅에 나뭇가지로 기역 니은 쓰고. 아버지가 조그만 조약돌을 갖다줘서 이렇게 쓰기도 하고 그러면서 글자도 배우고 했던 기억이 난대요.”

“학교 다닐 때 아버님한테 편지를 써서 드렸다고. 옛날에는 책 오려서 거기다 이렇게. 그리고 이렇게 접어서 봉투에 넣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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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학교에 들어가
꿈을 품다

9살에 청력을 완전히 손실하기 전에는 근처 일반 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수업을 따라가지도, 친구들과 어울리지도 못해 트라우마로 남을 만큼 적응이 어려웠다. 농학교가 많지 않았던 시절, 부모님이 수소문한 끝에 충주 성심농아학교에 다시 입학한다.

계속

그때가 열한 살이었는데 다시 1학년이 된 것이다. 농학교에 들어가서 자기 또래 친구들이 모두 수어를 쓰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자신에게 다가와 수어로 말을 거는 아이들을 보니 처음에는 무섭기도 했는데, 차츰 수어를 익혀가며 그곳 생활에 적응했다.

“학교에 갔을 때 동급생들이 듣고 말하는 아이들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 다 수어를 써서 처음에는 힘들었는데. (...) 13살 정도 되니까 서로 수어로 대화하고 그래서 그때 좀 많이 행복했던 것 같대요.”

농학교에서 중학교까지 마치는 동안 내내 기숙사 생활을 했다. 수업하고, 식사하고, 친구들과 이야기하고, 기숙사에 가서 잠을 청하는 생활의 반복이었다. 방학에도 집으로 가지 않았다. 푯값을 아끼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고향에 돌아가는 일이 반갑지 않았다. 가봤자 자신을 놀리는 아이들과, 수어를 하지 못하는 가족들 가운데 또 다시 섬처럼 고립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가족들도 수목 님을 보러 기숙사에 오지 않았다.

뒤늦게 들어간 농학교 시절은 다시 돌아가고 싶을 만큼 좋았던 시간으로 기억된다. 수어를 배우고, 수어로 대화하며 다른 사람과 관계 맺을 수 있고, 농인이라는 정체성이 소수자성을 갖지 않은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독서라는 취미도 갖게 되고, 청각장애인을 가르치는 국어 선생님이나 교수가 되고 싶다는 꿈도 갖게 한 공간이었다.

“어렸을 때 청력을 잃은 후에 동네 애들이 놀려서 너무 힘들었는데, 농학교에 들어가니까 농인 친구도 많이 생겨서 서로 얘기할 수 있고, 자연스럽게 ‘나는 농아인이다’라고 밝힐 수 있어서 좋았다고.”

“교사가 되고 싶었대요. 국어 선생님 되고 싶었대요. 교사 내지는 대학 교수가 된다든지, 가르치는 게 꿈이었다고 하네요. 청각장애인들 대부분이 국어에 약하거든요. 그런 걸 보면서 ‘아 이런 형태로 좀 가르치면 좋겠다’ 했어요.”

그러나 그때 학교에서 사귄 친구들과는 깊은 관계로 발전하지는 못했다. 졸업 후 친구들은 전국 각지의 고향으로 뿔뿔이 흩어져 현재는 소식을 모른다. 중학교 졸업 후 열아홉에 곧바로 중매 결혼을 하게 되면서 교사의 꿈도 접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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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의로 시작된 결혼 생활, 그리고 이혼

수목 님은 결혼 생각이 전혀 없었으나 농인 남성과 결혼하라는 부모 뜻을 따랐다. 농인 여성으로서 일을 하고 자립해서 살아가는 삶을 전망하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농학교 선생님도 결혼을 권유하며 중매를 섰고, 수목 님도 이후 삶에 대한 비전이 그려지지 않았는지 결혼을 받아들였다.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떻게 살고 싶은지 상상해볼 기회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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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에 대해서는 “그냥 살았다”고 표현할 만큼 어떻다 저떻다 할 만한 감정이 없었다. 부부 생활도 전혀 몰랐다. 첫 아이를 임신한 사실도 시아버지가 먼저 알아챘다.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5년간 노력한 끝에 가진 것이라 크게 기쁘지 않았다. 아이들과 소통이 어려워서 시부모가 아이들을 챙겨주다 보니 아이들과 친밀하게 교감하기도 어려웠다.

다만 결혼 생활 내내 시아버지가 수목 님을 잘 돌봐준 것은 감사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결혼 후 경기도 수원으로 이사했는데, 시아버지의 권유로 느즈막히 고등학교(수원여자고등학교)에 입학해 학업을 이어갔다. 일반 고등학교였는데 수업을 통역해주던 사람이 있었다. 당시 30대였으나 수목 님처럼 뒤늦게 입학한 동기들이 있어 괜찮았다. 그 외 친구들은 대체로 17-18살이었고, 수어를 가르쳐달라고 해서 엄마나 아빠 등 간단한 단어를 알려주기도 했다. 그 시간이 아주 즐거웠다.

남편은 매일 아침 7시에 나가서 종일 일하고 밤 9시가 넘어 들어왔기에 수목 님과의 별다른 교류가 없었다. 그러다 남편이 보증을 잘못 서면서 2,000만 원의 빚이 생겼다. 이 일로 인해 양가 부모가 크게 다퉜고, 사이가 틀어지면서 이혼을 강요했다. 이 과정에서도 당사자 둘의 의사가 개입될 여지가 없었다. 그때 수목 님의 아들은 7살, 딸은 2살이었다. 남편과 한 아이씩 양육권을 나눠 가지려고 했는데, 재판 과정에서 두 아이가 서로 절대 떨어지지 않으려 했다. 결국 수목 님이 양육권을 다 가져오게 되었으나 양육비는 전혀 받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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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두 아이를
키우다

공장에서 일하면서 한부모로 두 아이를 키우는 게 “죽을 만큼” 힘들었다. 싼 월셋집을 수소문해서 월 3만 원짜리 아주 열악한 방에 살았다. 1996년 당시 한 달 월급이 20만 원, 야근 수당을 포함할 경우 25만 원이었다.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훨씬 적은 급여를 받아야 했다. 공장에서 모피를 재단하는 일을 했지만 소통이 원활하지 않다는 이유로 해고당하는 경우가 잦았다.

계속

“‘야 너 왜 못 듣니, 너 가!’ 하고 해고당하면 구석에 가서 울기도 하고. 이렇게 ‘어후 야, 안 들려 답답하다’ 그러면서 나가라고 하고. 그런 경우를 좀 많이 당했대요.”

“농아인들이 많이 있었는데. 모피 가공하는 것, 미싱 쪽. 그 일을 하는데, 관리자가 계속 부르는데도 대답도 안 하고 못 들으니까. ‘이거 좀 옮기라’ 그러면 잘 안 들리니까 실수하기도 하고. 결국 그것 때문에 해고 되었대요.”

“그 당시만 해도 청각장애인이 주로 하는 게 농사 짓기였고, 안 들려도 괜찮으니까. 다른 데는 눈치껏 알아서 이해를 잘하는데, 관리자와 트러블 때문에. 이거 하라고 해도 안 들리고, 뭐라고 해도 안 들리니깐 귀찮아서 이제 해고하고...”

중학생인 아들이 급식비를 못 내서 수돗물로 배를 채운다는 이야기를 담임 선생님한테 전해 들었을 때는 너무나 괴로웠다. 다 포기하고 싶을 때가 많았지만 두 아이를 생각하며 견뎠다. 그러나 현재 성인이 된 아이들이 수목 님과 연락을 끊고 무정하게 지내고 있어서, 죽는 게 낫지 않은가 싶은 만큼 힘들다. 마지막으로 만난 건 3, 4년 전쯤 어버이날이었다. 아이들이 수목 님을 만나러 농아인협회 쪽으로 찾아왔다. 처음에는 얼굴이 많이 달라져서 알아보지도 못했는데 이름을 듣고 부둥켜안고 울었다. 그 후로는 만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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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폭력, 그리고
관계의 위축

첫 번째 남편과의 관계는 타인(양측 부모)의 의지로 시작되고 끝났다. 40대에 자발적으로 택한 남자와는 사실혼 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현재까지 이어지는 그의 폭력과 위협으로 관계는 고통만을 남겼다.

계속

동거남은 농인 커뮤니티 내에서 소개로 알게 된 사람인데, 처음 만날 때도 그의 평판이 나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여자 관계가 복잡하고, 여자를 폭행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설마’ 하며 믿지 않았다. 실제로 만나고 10여 년 동안은 아주 잘 지냈다. 그러다 40대 중후반부터 사이가 급격히 나빠지며 남자의 폭력이 시작되었다. 농사일로 받은 일당을 포함해 돈을 갈취해가고, 외도는 예사이며, 항의하면 폭력을 행사했다. 한번은 목을 심하게 졸려서 큰 부상을 입기도 했다. 이뿐만 아니라 SNS에서 수목 님을 사칭해 성적인 글을 올리며 주변 관계를 단절시켰다. 그 글 내용이 부끄러워 교육 봉사활동마저 중단했다.

이때부터 스트레스가 심해져서 우울증이 왔고, 약을 먹지 않으면 잠을 못 이룰 정도가 되었다. 4년 전부터는 별거하고 있는데, 그가 가끔 들이닥쳐서 다시 합치자며 협박하고 폭행하는 일이 일어났다(현재는 접근 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다고 한다). 수목 님을 사칭해서 SNS에 글을 올린 것도 경찰에 신고했지만 해결이 어려워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끝내 수목 님 편을 들어주고 협조해준 경찰이 해결의 실마리를 잡은 덕에 재판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이러한 일련의 경험은 수목 님에게 생긴 일이 단지 개인적인 불운 탓이 아니라, 농인 여성이 겪는 구조적인 문제의 일환이라는 의식을 갖게 했다.

“가정 내 남녀 관계에서 성폭력이 일어나거나 괴롭힘을 당했을 때 수어를 잘 모르고 그러니까 한쪽이 아니라고 발뺌하면 끝나는 거고. 경찰 조사 들어가더라도 특히 남자들이 거짓말하고 빠져나가면. 청각장애인이 잘 안 들리니까 대강대강 수화통역인 얘기만 듣고 빨리 마무리하려 하면 기분이 안 좋고. 비장애인 같으면 철저히 조사하고 캐묻고 그러는데, 대부분 수어통역사한테 물어보고 듣고 끝나는 경우가 많아서. 특히 농인들 성폭력 문제가 묻혀버리고. 청각장애인 남자들이 바람을 많이 피워서 여성을 괴롭게 하는 문제들, 비장애인 사회에서는 그럴 수 없는데.”

“대부분 젊은 세대는 안 그러는데 30대 이상들은 무학인 경우가 많고, 옛날에는 학교에 안 갔으니까. 그런 경우에는 청각장애인이 비장애인은 안 믿는데 농아인은 믿거든요, 수화 쓰니까. 수어를 활용해서 악용하는 남자들이 꽤 있다고 합니다. 그런 경우에 부부 간의 상식이 없다 보니 피해를 당해도 얘기를 못 해요. 40-60대 사이에 그런 일이 많이 생기는데, 그러면 단호하게 범죄자로 기록하거나 해야지, 40-60대 사이 남자들 보면 여자를 등쳐먹는 경우가 굉장히 많아서 인권적인 문제로 해결하면 좋겠다고. 여성을 폭행하거나 이용, 갈취하거나 바람을 피워서 여러 여성을 사귀는 경우가 되게 많다고 합니다.”


7

배우고 가르치는
일에 대한
관심과 보람

동거남 때문에 힘들어하던 중 수목 님은 지인의 권유로 법학 공부를 시작한다. 법에 대한 상식도 갖고 자신을 보호하는 데 도움이 될까 해서 사이버대학에 입학했다. 법학이라는 분야가 너무도 생소했고 때로는 수업에 수어통역이 제공되지 않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졸업까지 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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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금은 300만 원이 넘는데 장애인은 50프로 할인이라 80만 원 정도 냈다고 하네요. 장학금 포함돼서. 교수님이 F학점이면 장학금 안 준다고 해서 학점 받으려고 열심히 했다고 하네요. 어쩔 수 없이 밤새. A학점 받기는 너무나 힘들었다고. (...) 청각장애인이 가진 정보의 취약성 때문에 A학점은 한 번도 못 받았다고.”

동거남의 폭력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법 공부를 하기로 결심한 것도,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공부한 것도 수목 님의 주체성과 배움에 대한 의지를 보여준다. 지금도 꾸준히 도서관에 다니며 책을 빌려 읽으며 지낸다.

어릴 적 꿈을 가슴에 안고 사는 수목 님에게 ‘좋은 삶’은 누군가를 가르치는 꿈을 이루는 삶이다. 2-3년 전부터는 용산농아지원센터에서 농인 노인을 대상으로 글을 가르치는 봉사도 하며 그 소망을 충족해왔는데, 코로나 이후로 중단된 상태다. 수업은 단지 학습만 이뤄지는 게 아니라, 평생 학교에 가본 적 없던 이들이 수어로 배우고 소통할 수 있는 공간에 와서 일제시대 때부터 경험했던 일들을 털어놓으며 가슴에 맺힌 응어리를 푸는 시간이 되었다.

“그때 당시에 이렇게 봉사하면서 가르쳐본 것이 재미있었고 그분들도 좋아했고.”

수목 님은 스스로의 성격을 “정의롭지 못한 것, 나쁜 행동을 보면 참지 못하고 싫어”한다고 표현하는데, 그곳에서 일할 때 농인 노인을 비하하는 직원에게 항의한 일이 있다.

“비장애 직원끼리 대화하다가 노인을 놀리려고 휴대폰에 문자 찍어서 서로 이렇게 보여주면서 하는 걸 감췄는데, 그거 보고 뭐냐고 한번 꺼내보라고 봤더니 뭐 ‘벙어리, 미쳤다’ 그런 단어들이 보여서 화가 나서. 수화로 대화도 안 되고 직원끼리 그렇게 노인을 놀리면 쓰나. 스마트폰에 입력한 거 보라고. 그래서 결국 그 직원은 그만뒀다고 합니다.”


8

흔들리는 나무를
보며 고요히
살고 싶다

수목 님은 2015년경에 기초생활수급자가 되면서 현재는 혼자 LH 임대주택에 살고 있다. 동네가 허름하고 오래된 임대 아파트라서 대체로 나이 든 이들이 산다. 주변 환경이나 입지도 좋지 않아서 동네에서는 젊은 사람을 볼 수 없다고 한다. 이웃들과 수어로 소통할 수도 없다 보니 계단에서 마주쳤을 때 눈인사를 하는 정도다. 그렇기에 하루 4시간 집에 와서 자신을 도와주는 활동지원사와의 교류가 소중하다.

계속

나이가 많은데도 잘 돌봐줘서 애틋하고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다. 그러나 수어를 사용하는 활동지원사는 거의 없기에 그이와도 깊은 대화를 나누지는 못한다.

“2년 전부터 도움을 받기 시작했대요. 반찬도 가끔 만들어주고요. 먹으라고 이렇게 메모도 붙여주고. 항상 고마운 마음, 엄마 같은 마음이 들고 그래서 가끔 이렇게 눈물이 나기도 하고. 그분한테 고맙다 그러면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고도 하고. 빨래도 해주기도 하고 가끔 씻는 것도 도와주고.”

“수화 조금 배웠대요. 3년 전인가. 완전히 소통은 안 되는데. 눈치가 빨라서 어느 정도는 행동으로도 하고. ‘식사 하셨어요?’라든가 ‘예뻐요’, ‘사랑해요’, ‘건강하세요’ 같은 간단한 것들. ‘식사 드릴게요’ 같은. 연세가 많으시대요. 67세 정도. 가끔 문자 보내서 뭐 사오라고 하면 사오시고. 슈퍼 가서 물건 사다주시면 돈 드리고. 할머니라고 하긴 그렇고. 예전에는 좀 살집 있었는데 지금은 많이 말랐대요. 계단 오르고 내리면서 살이 빠졌다고. 이분도 계단 오르내리면서 살이 빠졌다고. 그런 얘기 한대요. 계단 숫자가 15개씩 이래요. (웃음)”

동거남이 저지른 SNS 사건으로 주변 농인들과의 관계가 모두 끊겨 고립된 생활을 하고 있을 당시 중증장애인독립생활연대 대표를 알게 됐고, 그에게 큰 위로를 받으며 4-5년 전부터 센터에 다니기 시작했다. 농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었는데, 수목 님을 시작으로 다른 농인들도 이곳을 알게 되고 여러 서비스를 받아 뿌듯한 맘도 있다.

현재 수목 님의 바람은 재판이 끝나고 자녀들과 관계를 회복한 후에 함께 시골에 내려가 오래된 집을 수리해서 지내는 것이다. 앞으로 3년이 될지 5년이 될지 모르지만 마음에 품고 있는 꿈이다. 태어나 자란 시골의 산천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나무가 흔들리는 것이나 자연 풍경을 보면서 고요히 살고 싶다. 시인이 되고 싶기도 했는데 그곳에서는 시를 써볼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