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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영선 님의 이야기

자유롭게 날기 위해 잠시 머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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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삶 | 꿈

현재는 각자 삶을 존중해주고 나를 중심으로 생활을 꾸릴 수 있는 후리덤(자유)

2019년 11월, 시설에서의 마지막 밤. 잠자리에 누운 호영선 님은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것을 지켜봤다. 내일이면 미지의 세계가 시작될 터였으니 당연했다. 한편으로 기대도 됐다. 이곳에서 14년을 살았으니 못할 게 없었다. 뜬눈으로 아침을 맞고서 지원주택에 입주했다. 쌀쌀한 날씨였지만, 방은 충분히 따뜻했고, 창문이 있어 답답하지 않았다. “후리덤!” 온몸에 감겨 있던 사슬이 끊긴 한 마리 용이 된 것 같았다. 모든 속박에서 벗어났다고 밤새도록 소리쳤다.
영선 님은 줄곧 ‘자유분방’을 추구하던 사람이었다. 상견례 자리에서 처음 보는 장인에게 바락바락 대들 정도로 스스로 결정한 삶에 대해 비난하거나 무시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참지 않았다. 확고한 취향도 있었다. 디제이가 되고 싶어 노래 다방에서 레코드 정리 아르바이트를 일부러 겸할 정도로 음악을 좋아했고, 고등학생 시절부터 손으로 빚고 만드는 작업을 즐겨 도자기 회사에 취직했다. 후에 지방 공무원으로 일하면서도 지인의 도자기 사업에 도움을 줬다.
불운은 불현듯 찾아와 도미노처럼 영선 님을 덮쳤다. 부모가 물려준 논밭을 밑천 삼아 친구들과 개시한 청과물 도매업이 파산으로 끝이 난 데다가, 책상 위에 발급 신청서가 수두룩이 쌓일 정도로 무분별하게 발급한 카드가 거대한 빚이 되어 돌아왔다. 더 이상 공무원 신분을 유지하기 어려워 전 재산을 가족들 명의로 돌리고 도피를 시작했다. 건설 현장에서 일하며 숙소 생활을 했다. 그러다 파이프에 머리를 맞는 사고를 당해 중도장애인 판정을 받고, 이 병원에서 저 병원으로 옮겨졌다.
2005년, 영선 님은 김포에 있는 석암베데스다요양원에서 시설 생활을 시작했다. 초기엔 적응하지 못했다. 시설은 교도소처럼 일정한 규율을 무조건적으로 따라야 하는 갑갑한 곳이었다. 그러한 생활이 죽기보다 싫었기에 자살 시도를 여러 번 했다. 1년이 지나고서는 딸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가장 예뻐했고, 자신을 잘 따르던 자식이어서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상심이 컸다. 이후 아내와 이혼하고 아들과의 관계도 정리했다.
시설에 머문 지 10년이 넘어가자 비로소 바깥 이야기가 귀에 들어왔다. 탈시설 정책에 대해 처음 접했을 때, 두려움이 앞섰다. 그러나 지원주택 사업의 프로세스와 안정성에 대해 이해하게 되면서 시도하기로 마음먹었다. 이음센터, 장애인인권, 발바닥행동 등 주변의 설득도 큰 영향을 미쳤다. 용기를 내어 자유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지금도 1층 현관으로 담배를 피우러 갈 때면 그때 감각이 되살아난다. 그 사이 벌써 1년이 지났다. 코로나 때문에 자유롭지 못한 부분이 많지만, 올해 이루고 싶은 꿈도 생겼다. 거실에 있는 4인용 식탁을 홈카페처럼 꾸미는 것이다. 꽃병에 꽃을 꽂아 두고, 직접 색칠한 그림도 붙여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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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우리 아버님은 요즘 부모들마냥 ‘너는 이런 계통으로 나가라’ 이런 얘기는 하실 줄 모르세요. 단, 몸으로 교육을 잘 시켰는데요. 내 몸에 맞는 지게를 만들어주어요. 그래가지고 아침에 눈만 뜨면 ‘야 지게 메고 따라와’ 그러고.”

호영선 님은 1959년 2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나 부천시 오정구 성복동에서 어린 시절과 학창 시절을 보냈다. 고향은 ‘나는 자연인이다’나 ‘6시 내고향’과 같은 프로그램에 흔히 등장하는 전형적인 시골로 산과 밭이 펼쳐진 곳이었다. 가난했지만 기질은 성실했던 아버지와 어머니는 자식들이 어릴 때부터 당신들의 일을 돕도록 가르쳤다. 그리고 장래를 위한 조언을 직접적으로 해주는 대신 ‘몸’으로 배우게 했다. 영선 님의 몸에 맞는 지게를 손수 만들어 함께 나무를 하러 갔고, 소죽 끓이는 법도 직접 가르쳤다.

“야산 많죠. 지게 메고 나무하러 가자고 그러십니다. 그럼 그 초등학교 때 조그마한 키에 지게 하나 덜렁 메고 쫄래쫄래 쫓아가면 하루 종일 걸리니까. 막상 산으로 가면 아버님이 내 지게에 맞게끔 다 준비를 해주세요. 나는 이제 걸어갔다가 걸어오기만 하면 되는 거죠. 그런 식으로 농사일을 가르쳤거든요. 그러면 해온 불쏘시개로 소죽을 끓이는 방법부터 뭐 이런 거를 손수 몸으로 가르쳐주신 분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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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기 싫어 학업에
매진하다

영선 님은 남보다 일찍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 부모 덕에 국민학교(현 초등학교)를 7살에 들어갔다. 학교가 가기 싫어 “땡땡이”도 치고, 그래서 형과 아버지에게 혼나면서 겨우 6년을 다녀 졸업했다. 중학교에 들어가서는 학업에 대한 태도가 바뀌었다. 새로 생긴 학교에 들어가 시험을 봤는데 좋은 성적을 거둬서 장학금을 탔고, 그 이후로 ‘지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 죽기 살기로 열심히 공부해 중고생 시절 항상 ‘장학금’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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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학회 같은 거죠. 그 지원을 받으면서 학교 생활을 시작했는데 중학교 1학년 때부터 남들보다 성적이 괜찮게 나와서 그 이후로는 지고 싶지가 않더라고요, 딴 놈들한테. 요즘 말로 얘기하면 ‘열공’을 했던 것 같아요.”

중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 아버지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 이후 형은 ‘가장’이 되었지만 가장 역할을 하지는 않았다. 아버지가 꾸리던 전답을 매형이 홀로 맡아 꾸렸는데, 형은 전혀 돕지 않았다. 형은 영선 님에게 필요한 게 있는지 물어보거나 마련해준 일이 없었다. 용돈은 고사하고 등록금도 주지 않았다. 영선 님은 스스로 장학금을 받아 해결했다.

고3이 되면서부터 ‘전자 부품’을 조립하는 곳에 취직해 돈을 벌기 시작했다. 어느 날, 어머니에게 꼬박꼬박 월급을 드리는 것이 못마땅했던 형수의 핀잔이 화근이 되어 형과 크게 싸웠는데, 이후 어머니가 머물던 누나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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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과 열정을
자유롭게 추구하다

부모에게 학업이나 직업에 대한 자문을 받은 적이 없던 영선 님은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해야 했다. 손으로 빚고 만드는 작업이 좋아 고등학교 실습실에서 인두로 서각을 곧잘 만들었다. 이후 도자기 회사에 취직했고, 지방 공무원으로 있으면서도 지인의 도자기 사업을 돕기도 했다. 만약 대학에 갈 형편이 되었다면 도예과에 진학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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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에도 관심 이상의 열정이 있었다. 디제이가 하고 싶어 음반 정리 작업을 해주면서 노래 다방에서 일하기도 했다. 그 시대 다른 청년들처럼 장발을 하고 나팔바지 차림으로 도끼빗을 뒷주머니에 꽂고 다녔다. 학창 시절 이후 경제 활동을 하면서 어머니와 여동생의 생활까지 도우며 좋아하는 활동을 지속해갔다.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충만했고, 취향과 열정을 자유롭게 추구하던 시절이었다. 스스로 결정한 삶에 대해 누군가가 비난하거나 무시하면 참기 어려웠다. 결혼하기 전 장인 장모를 처음 만났을 때도 양복을 챙겨 입었지만, 장발에 도끼빗은 그대로였다. 그런 자신이 못마땅했는지, 혼전 임신을 한 딸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장인은 딸을 보자마자 손찌검했다. 그때도 영선 님은 장인어른에게 바락바락 대들었다.

“예의상 부모님들 먼저 인사드리러 온 건데 내가 보는 앞에서 그렇게. 아무리 아버님 딸이지만 딸 체면도 있지 그렇게 오지게 갈기는 사람이 어디 있냐고 바락바락 대들었더니, 후에 들었는데 우리 장모님은 뒤에서 박수쳤대요. 잘한다 잘한다. 전라도 광주에 사셨던 분인데, 또 한 번 인사를 갔었어요. 그랬더니 그때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그만큼 장인어른이 가부장적이고 권위의식을 굉장히 따지는 분이라고. 나도 느꼈어요.”

영선 님에게는 다시 돌아가고 싶은 시절이다. 서로 약속하지 않아도 동네 어디쯤 가면 꼭 만날 수 있던 친구들과 늘 어울렸다. 절친 8명과 이름까지 지은 모임이 있다. 동네 대소사를 함께 챙기고, 선후배끼리 서로 일과 사람을 소개해줄 만큼 사회 관계가 원만했다.

“결혼할 무렵 생활이 어땠냐 하면, 일단 특별히 약속이 없어도요, 어느 장소에 가면 친구들이 항상 모여 있어요. 그러니까 사전 약속을 안 해도 그런 만남을 행했던 시절이 있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아주 철없던 시절이라고 그래야 되나. 한편으로는 그리워요, 그 시절이.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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겹겹이 찾아온 불운

능력과 취향에 따라 직업을 선택하며 경제 활동을 지속했지만 도약은 쉽지 않았다. 부모가 물려준 전답을 형제들끼리 나눠 가지고 난 후, 그것을 밑천 삼아 지인들과 청과물 도매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사업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던 영선 님과 친구들의 동업은 파산으로 끝이 났다. 그리고 IMF 이후 카드 발급이 쉬워지면서 감당하기 어려운 경제적 실패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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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 공무원으로 근무하던 당시 영선 님의 책상 위에는 카드 발급 신청서가 하루에도 수십 개씩 쌓였다. 결국 그것은 체납으로 이어졌고, 공무원 신분을 더 이상 유지하기 어려웠다. 영선 님은 가족들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았다. 법조계에 몸담고 있는 친구의 조언으로 집과 자동차를 포함해 전 재산을 가족들 명의로 옮겨두고 도피 생활을 하기로 했다. 2002년 월드컵 4강전으로 온 나라가 들썩이던 날 가족들이 경기를 볼 수 있게 자리를 마련하고, 본인은 경기장에서 공무를 보았다. 그 경기가 끝난 직후 떠났다.

도피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합법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이 없었기에 선배의 도움으로 경기도 군포에서 전기 공사를 하는 건설회사에 들어갔다. 오랜 시간 공무원을 했고, 관련 지식이 전혀 없었기에 하루를 견디기도 쉽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여러 사람과 함께 전선을 푸는 작업을 하던 중에 파이프 하나가 날아와 이마 위 안전모를 때렸다. 모자, 고글, 신발까지 안전 장비 착용이 필수적인 환경이었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숙소에 돌아와 샤워하고 저녁 식사를 준비하다 화장실에 갔는데 이후 눈을 뜨니 병원이었다. 동료들 말에 의하면 어지럽고 속이 불편하다며 화장실에 들어가더니 쓰러졌단다. 병원에서 눈을 뜨고서야 자신이 중도장애인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후 약 3년간 이 병원에서 저 병원으로 옮기는 생활을 했다. 간병을 고려해 군포에서 부천 소재 병원으로 옮긴 뒤, 비용 때문에 점점 더 열악한 병원으로 갔다. 그마저 부담되어 더 이상 지원이 어렵다고 판단한 큰 형은 그를 경남 밀양의 한 시설로 옮기려고 했다. 몸이 성치 않은 사람을 먼 곳에 보내려 하다니 너무하다고 생각한 여동생과 아내가 형과 큰 싸움을 했다. 겨우겨우 찾은 곳이 김포 석암베데스다요양원이었다. 영선 님은 2005년부터 그곳에 머물러 14년을 보냈다.

“대한민국에 장애인 시설이 이렇게 많은 줄 몰랐어요. 그때 당시에 우리 형은 나를 저 경남 밀양 요양소로 보내려고 했더라고요. (…) 향유의 집 전신 석암베데스다요양원이라는 곳에 연줄이 닿아서 김포로 오게 됐습니다. 그게 2005년도거든요. 그 연도는 내가 잊어 먹지도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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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설에 보낸 14년

영선 님은 자신으로 인해 고생하는 가족들에게 미안해 밀양으로 가게 되었을 때도, 다시 석암베데스다요양원(현 향유의집)으로 오게 되었을 때도 속마음을 드러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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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어릴 때부터 자신을 도와주지 않던 형이 자신이 몸을 가누기 어려워져서도 형제의 도리를 다하려 하지 않자 크게 실망했고 분노했다. 영선 님에게 시설은 스스로가 거동이 불편했던 것과는 별개로 교도소나 구치소처럼 모든 것이 규칙으로 정해져 있었고 그것을 잘 따라야 하는 갑갑한 곳이었다. 그러한 시설 생활이 죽기보다 싫었기에 자살 시도를 여러 번 했다.

“처음 시설 생활할 때는 진짜 깝깝했어요. 이건 뭐 교도소도 아니고 구치소도 아니고 시간 되면 식기 들고 밥 타 먹어야지. 시간 되면 잠자리에 들어야지. 죽기보다 싫어갖구 이렇게 생활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 하고는 자살 시도도 서너 번 했었어요, 초창기 때는.”

시설에 오고 1년이 지나 딸이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가장 아끼고 예뻐했고 자신을 곧잘 따르던 자식이었기에 상심이 컸다. 이후 스스로 가족들과의 관계를 정리했다. 남편과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못 하고 있다고 판단해 아내에게도 먼저 이혼을 제안했다. 엄마만 따르는 아들은 딱히 미덥지가 않았다. 그런 와중에도 고향 친구들은 이따금씩 면회를 왔다.

시간이 가면서 시설 생활에 익숙해졌다. 10여 년 넘게 지내면서 그곳에 있는 다른 이들과 교분도 생기고, 재활 교사들과도 잘 아는 사이가 되었고, 가끔 나가는 지역 탐방도 몸에 익었다. 이음센터*와 장애인인권과발바닥행동**에서 탈시설에 대해 알려주고 권했을 때, 영선 님은 두려웠다. 내가 원하는 삶은 아니지만 시설 내에서의 익숙해진 생활을 벗어나 지역사회라는 미지의 세계로 들어서야 했기 때문이다. 나름대로 경험을 하고 부딪혀야 하는 것이 다른 탈시설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두려움으로도 다가왔다.

* 이음센터(이음장애인자립생활센터)는 탈시설 운동의 구심체 역할 수행을 목표로 탈시설 당사자의 지원과 조직화, 시설거주인의 탈시설 지원 활동 등을 역동적으로 진행하는 기관이다.

** 한국사회 최초 장애인 탈시설 운동 NGO.

“그니깐 미지의 세계 아닙니까. 시설에 있을 때는 그래도 재활 교사들도 있고 거의 10년을 지내면서 개인적으로 교분도 많이 쌓아놨고 지역 탐방도 몸에 익힌 상태였는데 미지의 세계를 또 나름대로 경험하고 부딪혀야 되고. 나뿐만이 아니고 여기 이사 나온 친구들 얘기 들어보면 거의 비슷한 두려움들이 다 있었더라고요.”

이음센터 소장과 직원들 그리고 장애인인권과발바닥행동 의 조아라 팀장이 영선 님을 끈질기게 설득했다. SH에서 시범 사업으로 시작한 ‘지원주택’으로 그 과정과 안정성에 대해 이해하게 되면서, 두렵지만 시도하기로 마음 먹었다.

“많은 도움을 준 친구가 있는데요. 이음센터 소장도 그렇고 몇몇 직원 분들도 나 향유의집에 있을 때 여러 번 방문을 했었어요. 지금 정부 정책이 이렇게 돼 있고 마침 좋은 루트가 생겼으니까 한번 부딪혀보지 않을래. 여러 친구들이 내 머릿속에 세뇌를 시킨 거죠. 그래서 자의 반 타의 반이라는 소리를 썼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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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시설과
지원주택 입주

시설에서 보낸 마지막 날, 지원주택에 이사 온 날과 처음 맞은 아침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특히 시설에서의 마지막 날은 한숨도 자지 못했다. 미지의 세계가 두려웠던 만큼 호기심도 컸다. 어떤 연립주택인지 모르지만 아무리 낡고 허름하다고 해도 이 시설에서 14년을 살았으니 부딪쳐보자며 오기도 생겼다. 이사 온 날은 세상 좋았다. 두려움이 모두 사라질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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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선 님은 2019년 11월 지원주택에 입주했다. 쌀쌀한 날씨였지만, 방은 충분히 따듯했고, 창문이 있어 답답하지 않았다. 창문을 열고 살필 수 있는 거실도 있었다. 다음 날 아침에는 활동지원사 선생님이 와서 아침밥을 차려줬다. 어제까지만 해도 시설에서 바둥바둥 살았는데 이런 생활이 호사스럽게 느껴졌다. 지원주택 코디네이터 선생님에게 이렇게 자유가 좋은지 몰랐다고 거듭 얘기했다.

“이사 온 날 소감을 얘기하자면요. (사고) 전에 생활하는 것까지는 안 되더라도 세상 날아갈 것 같더라고요. 내 몸에 칭칭 감겨 있던 사슬이 끊긴 것 같고... 그러면서 살아왔어요, 1년 이상을… 여기 처음에 이사 왔을 때 내가 밤새도록 질렀던 소리가 있는데. ‘후리덤’이요. 나는 이제 모든 속박에서 벗어났다고 밤새도록 소리쳤어요.”

“예 그렇잖아요. 여기도 골뱅이(코디네이터 별명)가 무슨 많은 규정을 정해놓고 ‘따르시오’ 하면 또 입장이 틀려지겠지만, 현재는 각자 삶을 존중해주고 내 삶을 위주로 모든 게 돌아가니까 오로지 후리덤만 외칠 수밖에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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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이 되어
자유롭게 살아가다

돌이켜보면, 모든 게 후회스럽다. 한때 자녀의 학자금도 지원해주는 안정된 직장에 다니며 딸, 아들과 함께 가족을 꾸렸지만, 이제 자신을 가장 따르던 딸아이는 이 세상에 없고, 아내와 아들과의 관계도 소원해졌다. 고향 친구들을 찾아가 만나고 싶지만, 서울시 안에서만 ‘장애인 콜택시’를 이용할 수 있어 자립 후엔 오히려 만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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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영선 님이 바라는 것은 조금이라도 더 움직이고 활동하는 게 어렵지 않도록 건강 관리를 잘하고 생활을 새롭게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노래도 다시 즐기고, 일도 시작하고, 취미 생활도 다시 시작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왕년에 음악을 좋아했던 영선 님은 일주일에 한 번은 코디네이터 선생님이 있는 2층 커뮤니티 공간에 가서 노래를 부른다. 가지고 있는 핸드폰으로 음악을 찾고 재생하기가 어려워 매일 오는 활동지원사에게 부탁하곤 한다. 활동지원사는 영선 님이 예전에 좋아했던 팝 음악을 다운로드 받아 틀어준다. 특별히 좋아하는 노래는 스모키의 ‘리빙 넥스트 도어 투 앨리스(Living Next door to Alice)’*다.

* UK 요크셔 출신의 밴드 스모키(Smokie)가 1976년 싱글로만 발표한 곡.

영선 님은 2020년 서울시가 진행한 ‘권리 보장형 일자리’에 다녔다. 오후 1시 장애인 콜택시를 타고 이음센터에 가서 여러 가지 프로그램에 참여하다 보면 3시간 30분이 훌쩍 지나고, 집으로 돌아오면 하루를 마무리한다. 손작업을 하고 장애인 인권 교육을 받는 시간은 최근 자신의 이야기를 여러 사람에게 나누는 것으로 연결됐다.

“지금 시설에 있는 사람들 아니면 장애인으로 살아가는 친구들한테 힘이 되려고 한 말씀씩 하시겠습니까 하는 마음에 ‘나도 시설에 있다가 독립한 지 얼마 안 되는 사람이지만 여러분 두려워하지 말고 무조건 탈출하십시오’ 이 소리를 했어요.”

지원주택에서 산 지 벌써 1년이 지났지만, 코로나 때문에 자유롭지 못한 부분도 많았다. 영선 님은 이 빌라에서 ‘삶’을 꾸리는 자신과 이웃을 장애인이 아니라 ‘용’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빌라는 작은 용들이 넓은 세상과 하늘로 날아가기 위해 잠시 머무는 용굴이다.

“이 빌라를 그냥 단순한 집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거든요. 2층부터 6층까지 우리 10명이 살거든요. 어느 인터뷰에서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어요. 나는 여기 살림 차리러 온 게 아니고, 장애인이라는 표현도 안 쓰겠다고. 그럼 뭐라고 부를 거냐, 작은 용들이 넓은 세상 넓은 하늘을 날기 위해서 잠시 머무는 용굴이라고. 그러니까 선우빌 이꼴 드래곤하우스가 되겠죠. 우리 관계자 직원분들은 인포메이션 드래곤이 되겠죠.”

영선 님은 2021년 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 거실에 있는 4인용 식탁을 ‘홈카페’처럼 꾸미는 것이다. 이미 머릿속에 계획도 세웠다. 꽃병과 꽃을 두고, 자신이 인터넷에서 찾아 색칠한 그림도 붙여두고 싶다.

“5층에 보면 4인용 식탁이 있습니다. 거기를 지금 카페화를 하려고 구상하고 있거든요. 이 식탁을 이용해서 카페 분위기를 좀 내보려고 계획한 게 있어요. 그걸 하기 위해서 준비를 착착 해나가고 있거든요.”

작은 용으로 이곳에서 살아간다는 영선 님에게 ‘좋은 삶’이란 각자의 삶이 존중되는 자유로운 삶이다. 사회가 ‘장애인’에게 ‘좋은 삶’이라는 틀을 정해두고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의지’와 ‘취향’이 존중되는 자유로운 삶. 영선 님의 ‘드래곤하우스’는 이런 자유를 담고 있는 ‘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