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만석 님의 이야기
같이 살아가는 길
좋은 삶 | 꿈
아들이 많이 좋아해요. 아빠 모습 보니까 옛날 같지 않고 더 다정해졌고. 손녀딸 예쁘게 봐주려면 아버지도 정신 차려야하지 않겠냐. 그게 삶의 목표인 것 같아요. (...) 내가 변하고 있구나. 지금보다 좀 더 나은 삶이 되지 않을까요.
- 사랑하는 가족들, 손녀와 함께 하는 삶 👥
- 만성질환 관리를 위한 식단 조절과 운동 💦
- 생활의 틀을 잡아주는 계획과 목표 📌
- 경험과 역량, 적성을 살릴 수 있는 일 💼
- 사람들을 초대할 수 있는 나만의 공간 🏠
- 나아졌고 나아지고 있고 나아지리란 희망 💡
- 비슷한 어려움을 겪은 이웃과 도우며 살기 위한 노력 💬
- 사랑하는 가족들, 손녀와 함께 하는 삶 👥 만성질환 관리를 위한 식단 조절과 운동 💦 생활의 틀을 잡아주는 계획과 목표 📌 경험과 역량, 적성을 살릴 수 있는 일 💼 사람들을 초대할 수 있는 나만의 공간 🏠 나아졌고 나아지고 있고 나아지리란 희망 💡 비슷한 어려움을 겪은 이웃과 도우며 살기 위한 노력 💬
“어, 그게 남 일 같지 않더라고. 이게 내 일이구나. 이게 내 모습이구나. 그래서 뭐 소일거리도 되고, 동료를 위해서 이렇게 상담가를 한다는 게, 같이 살아가는 길 같아서.”
“어, 그게 남 일 같지 않더라고. 이게 내 일이구나. 이게 내 모습이구나. 그래서 뭐 소일거리도 되고, 동료를 위해서 이렇게 상담가를 한다는 게, 같이 살아가는 길 같아서.”
얼마 전 한만석 님에게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알코올 의존을 가진 주변 동료들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마주할 때마다 남 일 같지 않은 기분이 들어 장애인 동료상담가가 되기로 결심한 것이다. 방 안에 고립되어 있는 지원주택 입주자 동료들을 밖으로 데리고 나오려는 생각이다.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하기 위해 술을 자제하려고 노력 중이어서 이미 긍정적인 기운을 만들어내고 있다.
만석 님의 알코올 의존증은 아이러니하게도 어렵게 일궈냈던 경제적인 여유와 궤를 같이한다. 16세 때 사회 생활을 시작해 온갖 궂은 일을 해왔는데, 운 좋게 인수한 횟집이 억 단위 매출을 올리자 유흥에 빠져들어 아내와 이혼까지 갔다. 방이 술병으로 가득 찼다. 38세, 끝내 모든 것을 잃고 거리 생활을 시작한다. 이후 알코올 의존 노숙인 재활센터에 입퇴소를 반복하며 재활을 시도하다가 현재는 지원주택에 입주한 지 3년째다.
아내와의 이혼은 지금까지의 삶을 돌아봤을 때 가장 후회되는 일이다. 만석 님이 생각하는 “온전한 삶”이란 가족들과 함께하는 삶인데, 이혼 후 온 가족이 뿔뿔이 흩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석 님에게도 전처에게도 여전히 서로를 향한 애틋한 마음이 남아 있다. 최근엔 손녀딸이 태어나 또 다른 삶의 원동력이 돋았다. 젊은 시절 아이들에게 쏟지 못한 관심과 사랑을 손녀에게 전하고 싶다. 조금이라도 오래 살고 싶다. 그래서 식단과 운동 루틴을 챙기며 건강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알코올 의존과 싸우는 일은 지난한 과정임을 잘 안다. 지원주택에 입주한 후에도 상태가 심각해져 잠시 재활센터로 돌아가서 지낸 적이 있다. 마찬가지로 알코올 의존을 겪고 있는 지원주택 이웃들을 초대해 음식을 대접하길 즐겼지만 술자리로 이어지는 경우가 감당이 되지 않아 멈추게 됐다. 그러나 술 한 잔 들이켰다가 다음 날 인터뷰가 있어서 스스로 자제한 걸 보면 언젠가는 벗어날 수 있을 듯해 자신감이 생긴다. “계획을 잡으면 앞으로 좋은 일이 있을 것 같”다. 차근차근 일상을 꾸려나가려는 계획이 만석 님을 붙들어주고 있다.
1
프롤로그
한만석 님은 1969년 강원도 춘천에서 8남매 5남 3녀 중 일곱째로 태어났다. 작은 아버지네 식구들과 한 집에 살아 대가족 속에서 자랐다. 부모님은 농사를 지었는데 논과 밭이 각 3천 평 정도 있었다. 당시 집에서 소도 키웠고, 보리밥을 먹은 기억이 드문 만큼 가난하지는 않았다. 어린 시절 체구가 왜소하고 몸이 약했던 데 비해 식탐이 유별났는데, 나이 차가 많이 나는 큰누나 결혼식에서 떡을 먹느라 혼자만 가족 사진 촬영에 빠졌던 에피소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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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래 사촌들과 복작복작 어울리며 잘 지냈는데, 열한 살쯤에 큰 사고를 겪는다. 사촌 동생과 협력해 작두로 소 먹일 꼴을 자르다가 동생의 손가락을 다치게 한 것이다. 어린 마음에 너무나 놀라서 그 길로 곧장 기차를 타고 서울로 도망쳐 숨어버렸다. 혼이 날까 무서워 길거리에서 며칠을 보내다가 자신을 찾으러 온 아버지에게 이끌려 돌아가게 된다. 진심으로 사죄하자 어른들도 한만석 님을 크게 혼내지 않고 토닥였지만, 이때 받은 충격으로 글 쓰는 방법을 잊어버렸다. 지금도 긴 문장을 읽기는 하지만 쓰지는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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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일을
시작하다
그 후로 공부에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하던 한만석 님은 중학교 2학년 때 자퇴를 결심한다. 자신이 학업을 포기하면 공부를 아주 잘했던 누나가 지역 명문 고등학교에 입학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형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학교를 그만두며 대신 기술을 배워야겠다고 마음을 먹는다. 동네 “빠떼리집”이 첫 직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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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배터리나 부동액 교체하는 일을 했다. 그러다가 더 전문적으로 기술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에 서울로 이주한다. 서울 이모집에 머물면서 정비소에서 일을 배우는데, 그때 일터에서 기술자 형들과 어울리며 이른 나이에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게 16살 때였어요. 빠떼리집에 갔는데. 스패너와 몽키 같은 거 이름을 알아야지. 처음엔 그 부속 이름보다 기구 이름을 못 외워서, 작은 형님 친구분이 그 빠떼리집 기술잔데 좀 혼나게 해가지고. (...) 포기하라고. 잘못 갖고 오면 쇳덩어리로 머리통 치고. 그냥 계란 하나 쭉 생기는 거죠. 볼록 올라오고. 어휴. 가뜩이나 머리도 나빠 죽겠는데.”
18세가 되면서 친구들이 보고 싶어 고향 춘천으로 돌아온다. 형의 친구가 일하는 대형 빵집에 취직했다가 새벽 2시에 눈을 뜨는 고된 생활을 하며 별 이유 없이 많이 맞았다. 식탐이 있다 보니 빵 만드는 건 아주 좋았다. 남들은 계속 빵 냄새를 맡으니 질린다고 했지만, 모양이 어그러져서 버리는 빵을 먹어도 먹어도 싫지가 않았다. 그러나 수시로 가해지는 폭력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 당시 빵집에서는 세력 싸움이 좀 심했어요. 거북당하고 저기 대원당하고 이제 빵집끼리. 어려서 잘 모르겠는데, 세력 싸움인 것 같았어요. 그것 때문에 매도 맞아봐야 된다 그래가지고. 그냥 의미 없이 맞은 것 같았어요. 맞다가 큰형한테 도저히 못 맞겠다 그러고.”
결국 “매에 지쳐” 서울로 다시 돌아가 청계천 인쇄소에서 일을 시작했다. 페인트, 신나 냄새가 나는 열악한 환경에서 6개월가량 일했고, 그 후 고향 친구들과 함께 냄비 만드는 공장에서도 일했다. 오래지 않아 일을 그만두고 형과 형수와 조카가 사는 집에 함께 살면서 형이 근무하는 빙그레 라면 공장에 취직한다.
방위로 고향 동네에서 군 생활을 마치고 다시 공장으로 돌아가 일하던 중에 애인을 만나고, 혼전 임신으로 첫 아이를 갖게 된다. 둘은 가족의 반대를 피해 짧은 도피 생활을 하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양가의 허락을 받은 후 고향에 살림을 차렸는데, 아이가 태어나고서야 정식으로 결혼식을 치렀다. 아내의 산후 우울증으로 처가 근처로 이사를 간 후에는 보일러 회사에 다니고 일용직 노동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그 후 횟집에서 일하며 회 뜨는 법을 배웠는데, 운 좋게도 그 횟집을 인수하게 됐다. 30대 초반 횟집을 운영하던 때는 IMF 전으로, 장사가 아주 잘됐다. 강변에서 가게 입구에 천막을 치고 조개구이도 팔고 노래방도 함께 운영했다.
이처럼 한만석 님은 자동차 정비소, 인쇄소, 라면 공장, 식당, 농가 등 여러 곳에서 일을 했는데, 그중 요식업이 가장 잘 맞았다. “남들이 내 음식을 먹고 맛있다고 할 때” 기뻤다. 요리는 일종의 기술이 되어 이후 봉사 활동을 할 때나, 동료들을 대접할 때, 혈당량을 관리하며 식단을 챙기는 현재에도 요긴하게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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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에 빠져들다
신나게 일하며 횟집을 운영했더니 4, 5년 사이에 억 단위 매출을 올렸다. 아파트도 장만했다. 여유가 생기다 보니 10대 후반부터 줄곧 일하느라 놀지 못한 것에 대한 보상 심리가 올라왔다. 고향 친구들, 새로 사귄 친구들과 어울리며 노름에 빠졌고, 룸살롱에 다니며 외박을 거듭하기 시작했다. 결국 아내와 이혼하게 됐는데, 아내의 경고성 이혼 제안에 옳다구나 하고 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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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 후 자유분방한 생활을 지속하던 한만석 님에게 아내가 큰 딸이 아프다며 찾아온 적이 있다. 그 일을 계기로 집에 들어가서 얼마간 지내다가 아내에게 관계를 돌이킬 수 없는 망언을 하고 만다. 스스로도 감당하기 어려웠던 말을 내뱉고 나자 공허함과 함께 본격적으로 알코올 의존증이 찾아왔다.
38세, 전세금마저 잃고 갈 곳이 없어지자 처음으로 서울역에 갔다. 다른 건 몰라도 “술인심”은 좋았던 노숙인들 사이에서 술을 얻어 마시며 지내다가 “서울역보다는 좀 덜 무서운” 용산역으로 갔다. 용산역에서 지낼 때 아웃리치를 나온 사회복지사님을 만나고 다시서기 종합지원센터*를 알게 됐다. 공공근로 일을 하며 재활하기 위해 알코올 의존 및 정신질환 노숙인 재활센터인 Z센터에 입소한다.
* 대한성공회 산하 기관으로 노숙인을 보호하고 주거, 의료, 일자리 지원 등을 통해 자립을 지원하고자 활동하는 기관. http://www.homeless.or.kr/
“담배 인심하고 술 인심은 그렇게 좋더라고. 거기서 완전히 뭐 페인이 됐죠. 2007년도에 서울역은 무서우니까 용산역으로 가자 그랬어요. 거기서 이제 처음 사회복지사 선생님을 만났는데. 용산역 굴다리 밑에 가면은 잠잘 수 있게 이렇게 펜스를 쳐가지고 노숙자들이 모여서 먹고 자고 하는 그런 시스템이 돼버린 거예요. 용산역 역장이 거기 보기 싫다고 펜스 치우라고 해서 이제 거기에 있는데, 어떤 사람이 사회복지사라고 왔더라고. 아이 씨, 정신병원에 잡아넣는 것 같구나, 그래가지고 안 갔어요 처음에는. 근데 계속 찾아오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서울역 ‘다시서기’라는 데를 갔어요. 3년 정도 내가 공중에 뜨니까는 주민등록증이 말소가 되더라고요.”
한만석 님은 본인의 알코올 의존이 아버지로부터의 유전이라고 짐작한다. Z센터 프로그램 중 상담 과정에서 깨닫게 된 사실이다. 마음을 열지 않았던 한만석 님을 끝까지 기다려준 복지사 선생님에게 아주 힘겹게 아버지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아홉 살 때, 술을 드시고 쓰러져 있는 아버지를 혼자 발견했던 일이 트라우마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엄청 울었을 거야. 아버지 얘기하면서 뭐 이렇게. (...) 아버님이 약주 좀 드시고 어느 집 앞에 쓰러져 계셨을 때, 대문에다가 찍혀가지고 이만큼 찢어졌어요 아버님이. 내가 어린 마음에 그 난닝구로 해가지고 아버지를 감싸 안고 리어카로 모셔 갔는데 피가 멈추질 않는 거야. 그 트라우마가 엄청나더라구요.”
그러나 이후 센터에서 알코올 의존에 관한 교육을 받아도 잘 와닿지가 않았다. “첫 잔을 피하라”고 하는데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센터에 들어가서 금주를 한 지 54일 만에 작은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거짓말을 했다. 복지사 선생님에게 받은 차비로 가평역에 가서 술을 사 마셨다. 이후 센터에 입퇴소를 반복하기를 수차례, 지난한 시간을 보낸다. 그 사이 고향으로 돌아가서 농사를 짓기도 하고, 원인을 알 수 없는 통증으로 6개월을 앓기도 한다. 몸이 나아지면 다시 술을 마셨다. 술 마실 돈을 마련하려고 친척 형이 잠시 맡겨놓은 3천만 원을 빼돌려 서울로 도망쳤다. 노숙 생활의 재시작이었다.
서울로 돌아와 Z센터에 입퇴소를 십수 번 반복하는 와중에 한만석 님은 센터 문화의 변화를 느꼈다. 이전과 달리 ‘완전 단주’가 조건이 아니었다. 밖에서는 술을 마셔도 되지만 센터에 들어올 때 깨고 오라는 것이다. 그 덕에 전보다는 답답함이 덜했다. 센터에 있으면서 ‘아름다운 가게’의 일자리도 얻었다. 1년간 열심히 일하며 신용을 회복하고 돈도 모으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장례식장에 갔다가 술을 마시고 덜 깬 채로 출근한 것이 걸려 해고되고 말았다. 이후에 건설 현장 일용직, 횟집 알바 등을 이어갔으나 알코올 의존증으로 손떨림이 심해져 그나마 벌이가 쏠쏠하던 횟집 일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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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주택에 입주하다
센터에 머물던 한만석 님에게 복지사 선생님이 지원주택에 대해 알려줬고, 예전에 가족과 살았던 동네 근처의 지원주택에 입주하게 됐다. 입주한 지 만 3년이 된 현재는 여러 가지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식단과 운동 루틴을 챙기는 등 건강 관리도 하면서 지내고 있지만 초반에는 적응하기가 아주 힘들었다. 입주 직후에는 여관비도 안 들어가고 마음껏 술을 마실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다는 생각에 기뻐서 술을 왕창 마시고 싸움도 많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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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의 그 코뚜레를 풀어놓고. (...) 저 여기 왔을 때 진짜 힘들었어요. 직원하고 막 싸우고.”
“직원한테 욕하고. 시발새끼, 가 이 새끼야. 그때만 해도 뭐 방에서는 술을 먹어도 되는데, 모여서 먹다 세 번 걸리면 뭐 방을 뺀다든지. 근데 사람들이 뭐 애들도 아니고 다 성인이고, 그게 통해요?”
“근데 여기서 처음엔 한 두세 달 동안은 진짜 줄기차게 마셨어요. 뭐 일주일에 한 사흘 마시고. 한 이틀 쉬고. 속을 좀 달래려고 막걸리 한두 병을 더 마신 것 같아. 이렇게 장취가 되다 보니까 옛날 모습 나올까 봐 겁나더라고.”
한만석 님은 금단 증상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다. 이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도 이어진다. 술을 오래 끊었다가 다시 마신 적이 있는데, 그간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순식간에 과거의 상태로 돌아가버린 데 깊은 좌절감을 느끼기도 했다.
“후금단까지는 오진 않았는데, 후금단 오는 애들 보면은 이렇게 같이 이야기하다가 죽이려고 칼을 들고 온다든지, 환청이 보이고 환각이 보이고 그런 식으로. 그러면 이제 정신병원에 일주일 입원도 시키고, 보름도 입원시키고. 금단이라는 게 엄청 무서운 거예요. 손도 떨고 온몸이 떨리고. 여기서도 어떤 날은 이제 왕창 먹잖아요. 저도 제가 얼마큼 먹는지 모르겠는데 대충 보니까 한 소주 4병? 그러다가 맥주 피처 하나 더 먹으면 정신을 놓더라고요. 그러고 나면 속도 아프고, 그 다음 날 안 먹으면 힘도 없고, 당은 당대로 떨어지더니까 몸이 떨리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요즘 그렇게까지 먹지 않고 ‘아 저번에 죽다 살았는데’ 그런 생각이 나더라고요. 알코올 의존하고 많이 싸워야 되는 거 같아요. 그러다 보면 헤어 나올 수 있다 그러더라고.”
알코올 의존과 ‘싸우는’ 일은 지난한 과정이다. 지원주택에 입주한 후에도 알코올 의존 상태가 심각해지자 복지사 선생님들의 권유로 집을 비워두고 Z센터로 돌아가서 지냈던 적도 있다. 마찬가지로 알코올 의존을 겪고 있는 지원주택 이웃이자 동료들을 초대해서 음식을 대접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술자리로 이어지는 점이 힘들어서 하지 않게 됐다.
“소갈비 재우는 것도 하고 돼지갈비도 하고, 불고기도 재울 줄 알고. 가끔 LA 갈비 같은 거 먹으면, 이렇게 동료들 불러다가. 먹이는 건 좋은데, 꼭 우리집에서 술판을 벌이니까 잘 안 하려 해요. 제가 음식을 준비하면 술을 사 오더라고. 못 먹게 하기도 그렇고. 그러다 가끔 어울리면 저는 그냥 뭐 블랙아웃 될 때까지 마시기 때문에, 좀 겁나요. 몸이 예전 같지 않아서 한 번 마시면 가라앉으니까, 그게 너무 힘들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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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료상담가가
되기로 결심하다
최근 한만석 님에게는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장애인 동료상담가가 되어 입주자 동료들을 돌보고자 매주 온오프라인 교육 프로그램에 열심히 참여 중이다. 알코올 의존으로 인한 사망자를 볼 때마다 남 일 같지 않게 느껴지면서 지원주택 입주자 동료들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고민한 결과다. 상담가로 일하면서 소정의 활동비를 받으면 생계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 기대한다. 프로그램에 좋은 컨디션으로 참여하기 위해 술을 안 먹으려고 노력할 수 있어서 이미 과정에서부터 좋은 영향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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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도 잡고 싶더라고. 지푸라기도 잡고 싶은 심정에서, 다 한다 그랬어요. 어차피 프로그램이 있다 보면은 술을 좀 덜 먹게 되니…”
“술을 먹게 되면 실수를 많이 하잖아요. 뭐 쉽게 말해서, 여기가 방음 장치가 잘 안돼요. 그래가지고 시끄러워. 밤에 이제 문 두들기고 술 먹자 그래갖고 뭐, 돈 꿔달라 그러고, 그런 거 보면 안쓰러워요, 솔직히 말해서. 안쓰럽다 보니까 이 사람을 밖으로 좀 끄집어내야겠다는 생각은 갖고 있었어요.”
“여기 있는 사람들 방에 틀어박혀서 잘 안 나오는데, 같이 나가서 식사를 한다든지, 시장을 같이 본다든지, 그런 것도 동료상담가, 활동가의 역할이고.”
“여기서 사람 셋이 죽어 나갔어요. 첫 번째 죽은 애는 알코올 때문에 쇼크 상태에서 죽었다 그러더라고요. 다른 친구들은 나 있을 때 죽었는데, 어 그게 남 일 같지 않더라고. 이게 내 일이구나. 이게 내 모습이구나. 그래서 뭐 소일거리도 되고, 동료를 위해서 이렇게 상담가를 한다는 게, 같이 살아가는 길 같아서.”
사실 한만석 님은 Z센터 소속 봉사회 회장으로 활동한 베테랑 봉사자다. 주로 노인복지관, 장애인복지관 등으로 봉사 활동을 가서 본인의 특기인 요리 실력을 뽐내고, 나들이나 여행 시 활동보조를 한다. 그 과정에서 관계를 맺은 분에게 여행 사진을 뽑아 선물하기도 했다. 봉사 활동 500시간을 달성을 목전에 두고 있지만, 코로나 이후로 봉사 활동도 모두 중단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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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삶과 온전한 삶
지금까지의 삶을 돌아봤을 때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첫 딸이 태어났을 때인 반면, 가장 후회되는 일은 아내와의 이혼이다. 한만석 님이 생각하는 “온전한 삶”이란 가족들과 함께하는 삶이기 때문이다. 가족들과 뿔뿔이 흩어지게 된 이후 온전한 삶을 살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혼 후 시설 생활을 하며 알코올 의존에서 벗어나고자 힘겹게 분투하던 와중에 전처가 찾아와 진심으로 응원해주는 등 여전히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 서로에게 남아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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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이렇게 가족들끼리 오순도순, 화기애애, 집에서 산다는 거. 그 행복. 그리고 자식들이 커가는 행복감? 딸내미가 아빠한테 애교 부리는 모습도 좀 많이 보고.”
동료상담가 교육에도 참여하고, 건강을 더 신경 써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가장 큰 원동력 또한 가족이다. 친손녀가 태어나고 삶의 목표가 생겼다. 젊은 시절 아이들 곁에서 해주지 못한 것들을 손녀에게 해주고 싶다. 조금이라도 오래 살고 싶다.
“제가 52세에 할아버지가 됐어요. 그전에도 이제 술은 조금 자제하는 편이었는데 어 마음이. 쟤 초등학교 들어가는 거는 좀 봤으면. 지금 코로나 때문에 얼굴을 자주 못 보는데, 코로나 끝나면 ‘할아버지 까까 사줘’ 그럴 때 수중에라도 돈도 있어야 되고. 술 먹을 돈 좀 저축해서.”
“그래서 뭐 손도 좀 덜 떨었으면 좋고. 내가 이제 친손녀딸 초등학교 들어갈 때까지 살았으면 하는 큰 고민이에요. 당뇨 합병증으로 또 일찍 죽을까 봐 걱정되고. (...) 가끔 전화하면, 아빠가 뭐 좀 해봤으면 좋겠다, 마음은 굴뚝 같은데 지금 코로나라서. 코로나 터지기 전에는 예식장 주차 알바도 두 번씩 다니면 10만 원 되니까 그렇게 했었는데, 요즘 뭐 워낙 경기도 나쁘고 알바 자리도 없고 그러다 보니까.”
코로나 상황에 새로운 일자리를 구하는 것도, 자주 왕래하며 돌봐주는 것도 여의치 않다. 그럼에도 지금 자신만의 공간을 잘 유지하면서 차근차근 일상을 꾸려가려는 계획이 한만석 님을 붙들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