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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순 님의 이야기

새로운 희망이 시작되는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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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삶 | 꿈

남들과 똑같은 삶이요. 신호등이 켜지면 사람들이 지나가기도 하고 멈추기도 하는데 삶도 이렇게 지나가기도 하고 멈추면서 흘러가는 것 같아요. 평범하다는 것이 굉장히 어렵잖아요. 저도 남들과 같이 똑같이 평범하게 살고 싶어요.

몸을 누일 자리. 믿음직한 벽. 비스듬히 스미는 오후의 빛. 누구에게나 있어 마땅한 안전한 자리. 하지만 누군가에게 집은 하루빨리 벗어나고픈 지옥이고, 빼앗긴 기억이다.
정세순 님은 독립만을 꿈꾸던 아이였다. 집을 나오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될 것 같았다. 술에 취해 어머니를 때리는 아버지와 자신을 위협하고 폭행하는 오빠들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유일하게 마음을 나누던 존재인 어머니가 하늘로 가자, 얼마 되지 않아 ‘독립하니 찾지 말라’는 편지 한 통을 남기고 떠난다. 막 스무 살이 되던 해의 일이다.
삶은 생각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보일러도 안 들어오는 열악한 환경에서 혼자 지냈다. 당연한 수순처럼, 어느 날 문득 우울이라는 파도에 휩쓸려 중심을 잃고, 검은 물 밑에서 30대를 보낸다. 엎친 데 덮친 격 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무일푼이 되어 거리로 내몰리는데, 야구 모자를 눌러 쓰고 공원을 전전하는“하루살이”의 시작이었다. 고통의 시간이었다. 몸이 점점 말라갔다.
다행스럽게도 지금은 열린여성센터가 운영하는 공동생활가정에 살면서 유급 봉사자로 일하고 있다. 일 경험은 무너진 자존감을 서서히 회복시켰다. “누군가를 도우며 살고 싶다”는 꿈도 생기고 “처음으로 미래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아직 반쪽짜리 독립이라는 것을 안다. 머지않아 서울시에서 제공하는 지원주택에 입주할 예정이며, 일자리 지원 프로그램도 신청해놓은 상태다.
이제는 매일매일 스스로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연습을 한다. 그러다 보니 거울 속 사람이 사랑스러워졌다. 좋은 삶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신호등 같은 것”이라 답한다. 5분마다 바뀌는 신호등. 신호가 켜지면 사람들이 지나가고, 멈춘다. 지나가고, 멈추고. 지나가고, 멈추고. 창가에 선 세순 님이 굽이굽이 오고 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다. 방 안으로 햇살이 쏟아져 들어온다.

1

프롤로그

정세순 님은 1974년에 서울 마포에서 태어났다. 가족으로는 현재 위로 나이 차이가 제법 나는 오빠 두 명과 언니 한 명이 있다. 어머니는 세순 님이 고3 때, 아버지는 세순 님이 20대 때 돌아가셨다. 언니와 오빠들은 결혼이나 다른 이유로 일찍이 출가해서 어린 시절의 집을 떠올리면 엄마, 아빠와 지낸 기억만 있다. 그러나 그 기억은 참혹하다. 아버지는 잦은 폭음으로 어머니에게 상습적인 폭력을 행사했고, 어린 세순 님은 공포에 떨며 집 한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계속 울기만 했다.

어머니는 봉제 공장에서 미싱 일을 하며 가족의 생계를 홀로 책임졌다. 아버지는 밤낮 가리지 않고 술만 마셨다. 그러다 병원 신세도 몇 번 졌지만 좀처럼 변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경제 능력이 없어 집안 상황이 여유롭지 못한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술 중독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매일같이 이성을 잃는 것이 두려웠을 뿐이다. 조금이라도 온기가 있었다면 어떤 열악한 환경이라도 괜찮았을 것 같다. 어린 시절 세순 님이 겪은 집은 엄청난 트라우마로 남아 그 흔적을 지울 수 없다. 결단코 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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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 내 폭력으로
끔찍한 시절을
보내다

가족 여행을 가본 기억이 전혀 없는 세순 님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친구들은 모두 행복한데 자신만 불행한 아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하루는 친구가 집에 놀러 왔는데, 그날 역시 부모님의 싸움으로 집이 아수라장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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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는 무서움에 눈물을 쏟아냈다. 친구 앞에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싸우는 부모님이 너무 창피했다. 너무 어렸기에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그저 심한 수치심만 밀려올 뿐이었다.

“쇠로 만든 우산 있잖아요. 아직도 기억나는 게 아빠가 그걸로 엄마를 때리는데 엄마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식으로 맞고 있었어요. 그게 진짜 충격이었어요. 아빠보다 엄마가 더 무서워 보였어요. 소리를 지르거나 피해야 하는데 피하지를 않는 거예요.”

어머니만 피해자가 아니었다. 세순 님도 오빠들에게 가혹한 폭력을 당했다. 그 무서운 아빠조차도 그만하라며 만류할 정도였으나 오빠들은 멈추지를 않았다. 때때로 칼로 위협하기까지 하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친구 한 명이 경찰에 신고했지만 ‘가족 간의 사적인 싸움’으로 귀결되며 별 조치 없이 끝나고 말았다.

“아빠도 경찰서에 오시고 그랬죠. 근데 가족끼리 그런 거기 때문에... 그 당시에는 가정폭력 이런 게 잘 안 되어 있었나 봐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저희 아빠가 ‘그냥 동생이 잘못해서 (오빠가) 때린 건데’ 하면서 무마가 되었어요.”

폭력을 지켜보는 것도 폭력을 직접 당하는 것도 모두 잔인하다. 이 잔인한 경험은 세순 님의 삶 속에 깊숙이 박혔다. 지금도 종종 불안증이 예고 없이 찾아온다. 숨 쉬는 것도, 밖에 나가는 것도, 내일이 온다는 것도, 그 모든 것이 두렵고 무서워서 집에만 틀어박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로 하루하루를 의미 없이 보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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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조용조용하고 낯을 많이 가리는 세순 님은 학창 시절에 이렇다 할 친구 없이 홀로 지내는 경우가 많았다. 친구들과 큰 트러블 없이 무난하게 지냈지만, 중학교 때까지는 자신의 어려움이나 힘든 집안 사정을 터놓고 지낼 만한 친구가 하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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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에게 속내를 드러내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해 그 모든 어려움을 늘 혼자 삭이곤 했다. 고등학교에 올라가서야 친한 친구가 한 명 생겼는데, 그 역시 세순 님처럼 가정 형편이 어려웠던 까닭에 속사정을 유일하게 나누는 사이가 될 수 있었다.

가정 형편이 좋지 않다는 것은 선생님도 알고 있었다. 항상 걱정해주는 것처럼 보였으나 딱 그뿐이었다. 세순 님도 자진해서 상담을 청하지는 않았다. 이야기한다고 뭐가 달라지겠느냐 하는 생각이었다. 늘 그래온 것처럼 혼자 속으로 삭이고 참으면 지나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밖으로 쏟아내지 못한 감정들이 곪아 결국 화로 돌아왔다. 어느 시점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분출되기 시작했다.

그래도 어머니는 세순 님을 안아주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몸도 마음도 성할 날 없이 가혹한 삶이 계속되는 가운데, 친구도 많고 정도 많았던 어머니와 함께 보내는 시간만이 위안이었다. 아빠가 외박이라도 하는 날이면 어머니와 둘이 새벽까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 잠이 들곤 했다. 늘 혼자였던 세순 님에게 어머니는 설명할 수 없이 커다란 존재였다. 그랬던 어머니가 고등학교 3학년 때 갑자기 돌아가셨다. 세순 님은 세상에 내몰리는 듯했고, 감당할 수 없는 심적 고통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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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유일한 꿈이었던 독립 생활을 시작하다

공포로 얼룩졌던 어린 시절, 세순 님은 독립만을 꿈꿨다. 20살쯤에는 일을 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때가 되면 집에서 벗어나리라는 생각만으로 근근이 아르바이트하며 돈을 모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얼마 안 되어 20살이 되던 해, ‘독립하니 찾지 말라’는 편지 한 통 남겨놓고 무작정 집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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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원했던 독립을 이루니 그 기쁨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그간 모아둔 돈 100만 원을 가지고 상태는 좋지 않았으나 혼자 오롯이 지낼 수 있는 집을 구하고 나니 세상을 다 가진 듯했다.

독립하는 과정에서 큰 상처를 입기도 했다. 그동안 한 번도 집을 돌보지 않았던 오빠들이 난데없이 나타나 집에 아버지 혼자 두고 나간다는 이유로 세순 님을 폭행했다. 그래도 조금은 마음을 알아주고 염려해줄 것이라 믿었으나, 폭력의 이유는 단지 집을 나간다는 행위가 ‘잘못된 거야’라고 알려주기 위함이었다. 더 인연을 이어가고 싶지 않았기에 이후 관계를 끊었다.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한 덕분에 독립하면서 지금의 엘지패션인 럭키금성상사의 패션사업부 의류 판매원으로 취직해 큰 어려움 없이 독립 생활을 안정적으로 유지했다. 결혼도 생각했다. ‘완전한 독립은 결혼’이라는 생각으로 21살에 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 만나온 친구와 결혼을 시도했다. 그러나, 상대 집안의 경제력이 워낙 안 좋아 아버지가 심하게 반대했다. 세순 님의 집 상황이 좋지 않으니 더 나은 상대를 만나야 한다는 아버지의 생각을 꺾을 수가 없었다.

결혼이 무산되고 얼마 후 치매 증상이 있던 아버지의 상태가 술로 인해 급격히 나빠졌다. 아버지 병원비를 세순 님 혼자서 책임져야만 했다. 보증금 100에 월세 30을 주고 보일러도 잘 작동되지 않는 방에서 보증금을 500으로, 1000으로 불리기 위해 고생해가며 돈을 모으던 상황이었다. 서서히 나은 집을 얻기 위해 빡빡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때에 아버지 병원비는 부담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벗어나고 싶었던 아버지와 또다시 엮이는 것도 반갑지 않았다. 그래도 ‘인간의 도리’라는 생각으로 얼기설기 책임지고 있었으나 너무 힘들어서 어느 순간 연락을 끊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의 부고를 전해 받았다. 그러나 뵈러 가지 않았다. 지금은 후회되지만, 그때는 용서할 수 없는 증오의 감정들만 북받쳐 올라왔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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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병이 깊게
파고들다

20대 중반 무렵에는 친한 친구와 3년 정도 같이 생활한 적도 있었다. 세순 님에게는 가장 좋았던 기억이다. 반짝거리다 사라진 시간이지만 누군가와 한 공간에 있어 외롭지 않았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걱정해주던 그때가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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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엔 줄곧 혼자 지냈다. 독립이 유일한 꿈이었던 세순 님은 집을 나와 생활하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될 것만 같았다. 하지만 보일러도 안 들어오는 열악한 환경에서 홀로 지내는 삶은 생각처럼 나아지는 모양새가 아니었다.

직장 생활을 이어가던 어느 날 갑작스레 우울감이 밀려왔다. 그 우울감은 불면증으로 이어져 3~4일 밤을 꼬박 새우며 지낼 때도 더러 생겼다. 이유 없이 사람들을 피하고만 싶어졌다. 낮에는 늘어져 지내다 밤에 잠시 근처 편의점에나 다녀오는 생활이 반복됐다. 그렇게 우울증을 방치한 채 30대로 접어들었다. 30대에 겪은 우울증은 약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생활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했다. 늘 ‘외롭지 않다, 외롭지 않다’를 되새기며 스스로를 긍정하고 지내도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자해 행동까지도 스스럼없이 저질렀다.

“갑자기 사람들이 되게 싫어졌어요. 밖을 못 나갔어요. 그렇게 되다 보니 일에도 지장이 생겼어요. 늘 ‘몸이 어디 안 좋냐’는 소리를 많이 듣고요. 우울증 때문에 잠도 못 자고 불안감도 심해지고 그래서 직장을 오래 못 다니게 되더라구요. 1년 내내 밖을 안 나간 적도 있어요. 집 안에서만 모든 생활을 했고요. 자지도 않고 먹지도 않으면서요.”

30대 중반을 지나면서 세순 님은 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큰 위기를 겪었다. 깊어질 대로 깊어진 마음의 병도 버거운데 경제적인 어려움까지 닥친 것도 모자라 믿었던 친구의 배신까지 겹친 것이다. 모든 것이 절망적이었다. 가압류 통지를 받고 나서 우울증이라는 깊은 터널에 다시 갇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세순 님이 걱정되어 저녁상을 차려주러 온 친구가 실수로 뜨거운 국물을 다리에 쏟아 화상을 입어 병원에 입원했다. 이 일까지 겪으니 자신이 너무 초라해졌고, 자신의 삶만 너무 가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에 남은 게 하나도 없는 것 같은 상황에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숨쉬기조차 버거운 상황의 연속에서 사회에 지원을 요청하는 방법도 몰랐고, 요청해도 들어줄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세순 님이 삶을 이어나갈 수 있었던 것은 옆에서 끼니를 도와주던 남자친구와 몇 명의 지인들 덕분이었다. 그러나 남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며 삶을 이어나가는 자신의 모습이 스스로 무엇도 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 같아 괴로웠다. 결국 이들과의 관계도 끊어버린 채 더 고립된 생활을 이어나갔고, 매일매일 인터넷에서 죽는 방법을 검색하며 죽는 꿈만 꾸었다. 그리고 실제로 여러 번 시도를 감행했다. 자신이 죽음을 가볍게 대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참기 어려울 만큼 괴로웠다.

“제가 여러 번 시도했었잖아요. 죽음에 대한 미련이 없어서 무서움을 못 느꼈던 것 같아요. 죽는 것 자체가 무서운 거잖아요. 내가 사라지는 건데. 그런데 그 죽음에 대해서 제가 실천을 해버리니까 그 자체가 무섭더라고요. 이러다가 진짜 내가 죽나? 계속 이런 식으로 살아야 하나? 그런 갈등을 하고 있으면서 죽음에 대해서 쉽게 생각하는 제 자신이 무섭다고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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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밖으로 내몰려
시설까지 흘러들다

마흔 직전에 집 보증금마저 다 날리고 무일푼이 된 세순 님은 배낭 하나 덜렁 메고서 도망치듯 집을 나왔다. 이후 사정을 이야기하고 싼값에 찜질방을 찾아다녔다. 그 돈마저 없을 때는 친구에게 빌려 해결했으나 그것도 한두 번이지 친구에게 폐를 끼치면 어쩌나 하며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래서 공원을 전전하며 노숙 생활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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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 한 끼도 못 먹을 때가 대부분이었고, 밤이 되면 무서워서 잠을 청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지켜냈다. 얼굴이 보이지 않게 일부러 야구 모자를 눌러쓰고, 사람들이 다가와 말을 걸면 겁이 나서 피했다. 대인 기피증이 더 심화되고 우울감도 다스리기 어려워졌으나 돈이 없어 치료를 받을 수가 없었다. 환청도 들리기 시작했다. 저 멀리 있는 사람이 자신의 다리에 난 화상 자국에 대해 이야기하는 소리가 가까이 들리는 듯했다. 고통의 시간이었다. 결국 무엇에 홀린 듯 물가로 걸어 들어갔다. 다행히 세순 님을 지켜보던 사람이 있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렇다고 삶은 달라지지 않았다. 여름이 다가오던 때였는데 몸무게가 40킬로도 채 나가지 않을 정도로 심각하게 말라 있었다. 이 상황을 보다 못한 친구 남편이 더 낭떠러지로 가기 전에 주민센터 복지사를 찾아 신속히 상담을 받아보라고 권유했다. 노숙 생활로 너덜해지고 지저분해진 모습을 보이는 것도 창피했고 이런저런 이유로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마지막 남은 용기를 내어 버스에 올라 주민센터까지 직접 찾아갔다.

주민센터 복지사와 개별 상담 후 전문의의 진료가 필요하다는 소견을 받고 바로 병원으로 연결되었고, 의사의 소견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세순 님에게 정신병원은 제정신이 아닌 사람들이 사는 무서운 곳이었기에 처음 병원에 발을 내디뎠을 때 무서움이 컸다. 실제로도 처음 보는 폐쇄 병동 풍경에 놀랐으며, 다른 사람에 비해 자신은 증상이 가볍다는 것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기상 시간과 약 복용 시간, 티브이 시청 시간과 소등 시간 등 모든 것이 통제된 생활이어서 답답하고 무기력했지만, 잠을 잘 수 있고 누군가가 주는 밥을 제때 먹을 수 있다는 사실에 만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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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이 보이기
시작하다

병원 생활이 3개월 차에 접어들자 몸도 호전된 것처럼 느껴졌고, 무엇보다 아무 생각 없이 무료하게 지내는 삶이 힘들었다. 어느 날 병원에 방문한 열린여성센터*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 순간부터 다른 삶으로의 항해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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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세순 님은 정신병원 생활을 청산하고 단신여성 및 모자가정 노숙인 재활·자활시설인 열린여성센터에서에서 운영하는 공동생활가정에서 2년 정도 시간을 보내면서 사단법인 열린복지가 운영하는 ‘열린공간함께’에서 유급 봉사자로 활동하며 소소한 일상을 즐기고 있다. ‘열린공간함께’에서의 일 경험은 자기 존재에 대한 의미를 찾게 해줬다. 누군가를 도우면서 살고 싶다는 꿈도 생기면서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일하며 삶을 가꾸어나갈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됐다.

"‘열린공간함께’에서 일하는 것이 좋은데요. 저보다도 힘든 선생님들이 많이 계시거든요. 많이 안타깝고 제발 약 좀 잘 드시고 재발되지 않으면 좋겠어요. 선생님들과 소통하면 보람이 느껴져요. 여기서 일하는 복지사 선생님들을 보면서 나도 복지사가 되어 누군가를 도우며 살고 싶다는 꿈도 꾸어보고, 봉사 활동도 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고요. 컴퓨터 스킬도 배워볼까 싶기도 하고, 처음으로 미래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어요.”

열린여성센터를 만나고 나서 또 하나 바뀐 것은 자신을 사랑하게 됐다는 점이다. 매일매일 스스로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연습을 하다 보니 거울 속 정세순이 진짜로 사랑스러워 보이기 시작했다. 이후로 자신이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 스스로를 격려하게 됐다.

조만간 서울시에서 제공하는 지원주택에 입주할 예정이다. 진짜 나만의 공간이 생기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대로 공간을 꾸미고 자유롭게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집을 갖게 된다는 것이 큰 희망의 빛으로 다가온다. 집 밖으로 내몰렸을 때의 기억이 사라진 것은 아니어서 잘못하다가 또다시 내몰리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 가끔씩 엄습하기도 한다. 그래도 이금희의 라디오 방송 '사랑하기 좋은 날'을 듣고 싶을 때 듣고, '전원일기'도 마음껏 보고, 맛있는 음식도 해 먹고 친구들도 불러 편안하게 이야기 나눌 수 있는 공간을 기대하며 산다.

“예전에는 그냥 포기가 되게 빨랐어요. 안 되면 안 되는구나. 그냥 희망이라는 것 자체를, 그 단어 자체를 모르고 지냈던 것 같아요. 근데 요즘에는 앞으로 어떻게 지내야 되나 싶어요. 그리고 지원주택을 얻으면 이사를 가서 일자리를 구해야 하는 거잖아요? 예전에는 그런 게 없었는데 취업까지도 생각하게 되는 것 같아요.”

열린여성센터에 의존하며 살고 있는 현재 삶은 반쪽짜리 독립이다. 이곳에서도 벗어나 온전히 혼자서 사회의 일원이 되는 경험을 하기 위해 일자리를 지원해주는 자활과 차상위조건부수급도 신청한 상태다. 세순 님은 오늘도 창밖을 지나가는 다른 사람들처럼 사회로 나가 일하며 다시금 살아 있음을, 그리고 살아갈 수 있음을 경험하면서 이 사회에 환대받으며 자기 공간을 만들어가는 미래를 꿈꾼다.

* 사단법인 열린복지 열린여성센터는 주거를 잃거나 노숙 위기 상황에 처한 여성 및 모자가정이 다시금 사회의 일원으로 자리잡고 살아갈 수 있도록 지원하는 곳이다. 15여 년 동안 1,000여 명의 대상자가 시설을 이용하고 100여 명이 지역에 정착하여 생활하고 있으나, 가족 단절 및 사회 단절로 인해 외롭고 고립된 삶을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이에 2019년 7월 외로운 사람들이 모여 즐거움을 찾는 공간, 지역 내 소외된 분들이 함께 하는 공간, ‘열린공간함께’를 개소하여 당사자가 주도적으로 함께 밥을 짓고 나누고, 소소한 일자리도 만들어가는 공간을 함께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