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혜랑 님의 이야기
집의 의미를 회복하는 여행
좋은 삶 | 꿈
내가 살다 보니까, 원래 내가 좀 사람들 챙기고 나누는 사람이지만 사람들하고 어울리고 같이. 두루두루. 그게 좋은 거 같아요. 같이 챙겨주고. 여기 같이 다 늙어가잖아요. 그런 게 좋은 것 같아요.
- 위기 상황 극복을 돕는 지지자 그룹 👥
- 쾌적한 주거 환경과 지속적인 주거 관리 🏠
- 라이프스킬을 기를 수 있는 다양한 기회 💡
- 서로 돌보고 의지하는 이웃 공동체 💐
- 좋아하는 음악 디제잉을 함께 즐기는 기회 🎼
- 심리적 안정을 가져다주는 종교적 신념 🙏
- 재정적인 안정과 일자리 💼
- 위기 상황 극복을 돕는 지지자 그룹 👥 쾌적한 주거 환경과 지속적인 주거 관리 🏠 라이프스킬을 기를 수 있는 다양한 기회 💡 서로 돌보고 의지하는 이웃 공동체 💐 좋아하는 음악 디제잉을 함께 즐기는 기회 🎼 심리적인 안정을 가져다주는 종교적 신념 🙏 재정적인 안정과 일자리 💼
“집은요, 예전에는 끔찍한 곳이었는데 지금은 저한테 아주 중요하고 안정을 주고 그런 곳이죠.”
“집은요, 예전에는 끔찍한 곳이었는데 지금은 저한테 아주 중요하고 안정을 주고 그런 곳이죠.”
이혜랑 님은 ‘오지라퍼’다. 본인이 인정한 사실이다. 지루한 거라면 딱 질색이고, 어색한 분위기가 싫어 가만히 있지를 못한다. 남들을 재밌게 만드는 일이 좋다. 그래서인지 이곳 지원주택 이웃들 역시 그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다. 혜랑 님은 이제 안정감을 느낀다. ‘집’을 찾기까지 겪은 우여곡절이 눈앞을 스친다.
유년 시절의 집은 폭력이 일상처럼 이뤄지던 끔찍한 공간이었다. 일찍부터 거리를 배회하며 일진 친구들과 어울려 지낸 이유다. 그러다가 강제 전학 처분을 받기도 하고, 결국엔 퇴학을 당해 학교를 그만뒀다. 그 후로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살았다. 밥 사 먹을 돈이 떨어져도 집에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가족은 의미를 잃은 지 이미 오래였다.
20대 초반에 만난 한 남자와 동거를 하면서 안락한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남자는 사업이 틀어지자 술에 의존했고, 기어이 폭력을 휘둘렀다. 그래서 탈출했다. 정신이 온전할 리 없었다. 술을 잔뜩 마시고 자해를 했다. 다행히 구조되었지만, 갈 곳도 의지할 이도 없어 다시 노숙 생활을 시작했다. 자포자기 상태에서 동생에게 이끌려 시설과 정신병원에 가게 됐는데, 답답함을 견디지 못해 빠져나오고 다시 들어가길 반복했다.
고시원을 전전하다 찾은 열린여성센터는 몹시 낯선 분위기였다. 군대 같은 시설식 생활이 아니라 자유가 보장됐기 때문이다. 동료들과도 친하게 지냈고, 센터의 소개를 받아 카페 매니저로 일하기도 했다. 바리스타 자격증도 취득했다. 그때 처음으로 ‘정착했다’는 기분이 들었다. 난생 처음 세간살이를 내 돈 주고 사본 것이다. 너무 애착이 갔고 하나하나 늘어선 모습을 보니 행복했다. 그렇게 2년을 보내고서, 자립하기로 마음먹는다.
혜랑 님은 음악에 몰입할 때 즐겁다. 더 좋은 디제잉 기계를 사고, 공연도 하고 싶다. 지금 이곳 지원주택에서 이웃들과 서로를 돌보며 살다 보니 삶을 정의하고 앞을 상상할 수 있게 됐다. 좋은 삶이란 함께 두루두루 돌보는 삶이고 서로를 통해 배우고 닮아가는 삶이라 한다. 다시 말해, 새출발이다. 여전히 순탄치 않을지 모른다. 실제로 자립을 결심하고 여기 오기까지도 수차례 위기가 있었다. 하지만 괜찮다.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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끔찍한 공간에서
살아가다
유년 시절부터 집은 안전한 공간도 편안한 공간도 아니었다. 이혜랑 님은 1977년에 태어나 미아리에서 자랐다. 부모와 할머니, 두 여동생과 함께였다. 결코 순탄치 않은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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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고된 가사일로 인한 스트레스를 혜랑 님에게 풀었다. 강도 높은 폭력이 오랫동안 이어졌다. 가족들은 그 사실을 모른 체했다. 가끔 이웃집 아주머니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했지만, 혜랑 님은 그 아주머니가 자기 딸을 똑같이 학대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자신을 지켜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결국 폭력에 시달리다 못해 가출을 했다. 작은 가방 하나를 메고 뒷산으로 도망치듯 올라갔지만, 오래지 않아 집으로 돌아갔다.
“맨날 집에 들어오면 엄마한테 맞아요. 그럼 또 나가요. 나갔는데 못 들어가요. 왜냐, 엄마가 무섭기 때문에. 가면 엄청나게 맞을 텐데. 또 밤늦게 들어가려니 엄마가 화를 내겠지, 또 때리겠지, 그러다가 밤새도록 돌아다녀요. 그 조그만 게요.”
“회초리로 때리고 그런 게 아니고요. 뭐 있는 대로 잡아갖고 머리를 많이 때려요. 아직까지 제 머리를 이렇게 쓸 수 있다는 게 너무 신기한데요. 체벌하는 시간이 짧지도 않아요. 때려놓고 와서 또 때리고. 계속. 그러다가 엄마가 뭐가 생각나면 막 때리는 거예요. ‘니 애비가 어쩌고 저쩌고’ ‘너 같은 딸 낳아갖고 평생 고생하라고’ 악담하고. 계속 그런 걸 들었어요. 맞을 때마다.”
집은 폭력이 일상처럼 이뤄지던 ‘끔찍한’ 공간이었다. 폭력을 피해 혜랑 님은 일찍부터 집을 나와 생활했다. 밤새 길을 걷기도 하고, 친구 집에서 잠을 청하기도 했다. 마음 둘 곳이 없던 그 시절, 유일한 안식처는 같은 동네 친구들이었다. 모두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온 이들이었다. 혜랑 님은 그 친구들과 어울리며 소위 ‘비행청소년’이 되었다. 학교에서는 ‘일진’으로 불렸고, 어떠한 사건으로 강제 전학 처분을 받기도 했다. 새 출발을 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새로운 학교에 혜랑 님이 ‘놀던 아이’라는 소문이 퍼졌고, 또 다시 비행청소년들과 어울리는 생활이 시작됐다. 그러다 향정신성 약물에 손을 대 구치소에 수감되는 일이 벌어졌다. 아버지가 동생과 함께 면회를 왔다. 혜랑 님은 집으로 돌아가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며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다시는 이곳에 들어오지 않아야겠다고 결심했다.
오래지 않아 혜랑 님은 학교에 더 이상 나가지 않았다. 어머니는 계속 공부를 할 거냐고 물었다. 하지 않겠다고 대답했지만 마음 한편에는 학교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남아 있었다. 그때 혜랑 님은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해주고 격려해줄 어른을 찾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어른은 나타나지 않았고, 결국 퇴학 통보를 받아 학교를 그만두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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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집을 벗어나다
학교를 그만둔 혜랑 님은 친구들과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생활했다. 돈이 다 떨어져 굶은 적도 많았지만, 그렇다고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집이나 가족은 의미를 잃은 지 이미 오래였다. 가족에 대해서는 어떠한 아쉬움이나 긍정하는 마음도 남아 있지 않았다. 길을 지나다 우연히 마주치는 단란한 가족의 모습이 낯설고 이상하게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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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엄마 이거 사줬다, 아니면 놀러 갔다, (하는 말이나) 길 가다가도 엄마가 막 이렇게 귀여워해주는 모습이 정상적이지 않게 보였어요. 내가 내가 정상인 거예요. ‘저렇게 다정할 수 있지?’ 그런 생각을 했었어요. 그러니까 더 이상해 보이는 거야. 참.”
20대 초반에는 한 남자를 만났다. 다정한 사람이었다. 그 사람에게 부모로부터 받지 못한 사랑을 받았다. 그와 동거를 시작했다. 그는 혜랑 님이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었다.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있었지만 자립과는 점점 멀어졌다. 가까웠던 친구들과 연락이 끊겼고, 스스로 해낼 수 있는 기회가 사라졌다.
“10년 후에는 이제 내가 뭐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맨날 이 사람 그늘 안에서 이렇게 좋게 있다가.”
둘의 관계는 남자의 사업이 어려워지면서 급속도로 나빠졌다. 남자는 술에 의존했고, 혜랑 님을 때리기까지 했다. 집을 탈출하듯 나온 혜랑 님은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술을 마시고 자해를 했다. 눈을 떠보니 병원이었고, 옆에는 동생이 있었다. 퇴원 후 동생 집에 잠시 머물렀지만, 동생과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집을 나와 한동안 고시원 생활과 거리 생활을 했다. 갈 곳도 의지할 사람도 없던 혜랑 님에게는 고려할 만한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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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설 생활을
시작하다
동생은 자포자기 상태였던 혜랑 님을 시설로 데려갔다. 시설에 입소하자 낯선 풍경들이 견딜 수 없을 만큼 무서웠다. 바로 다음날 시설을 몰래 빠져나왔다. 동생은 거리를 배회하던 혜랑 님을 찾아 차에 태우고는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물었다. 시설로 다시 들어가고 싶지가 않았지만 달리 갈 곳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당시 혜랑 님은 환청이 들리고 건강이 좋지 않았다. 동생은 혜랑 님을 정신병원에 데려가 입원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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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회를 왔더라고요. 제가 그랬나 봐요, 엄마한테. 왜 나를 칼로 때렸냐고 그때. 여기 상처도 있거든요. 그러니까 엄마는 ‘무슨 소리 하냐고’. 그냥 엄마가 인정하고 잘못했다 그러면 되는데 ‘내가 언제 그랬냐고’. 엄마 보자마자 제가 그런 소리를 한 거예요. 계속 하고 싶었던 말이었어요. 서른살에 처음 그 얘기를 해본 거죠. ‘그때 나 왜 칼로 때렸냐’.”
면회를 온 어머니를 마주하고서 오랫동안 묻고 싶었던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어머니는 답하지 않았다. 병원에서 세 달여의 시간을 보내고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혜랑 님은 동생에게 전화를 걸어 퇴원시켜달라고 애원했다. 결국 퇴원을 했지만, 여전히 갈 곳이 없었다. 할 수 없이 도망쳐 나온 시설로 다시 돌아가야만 했다.
시설 생활은 힘들었다. 돈도, 휴대폰도 소지할 수 없었고, 짜여진 프로그램대로 생활해야 했다. 하지만 그런 생활도 차츰 적응이 됐다. 약을 복용하면서 건강도 좋아졌다. 그럼에도 여전히 시설은 답답한 곳이었다. 2년 동안 혜랑 님은 시설을 몇 차례 드나들었다. 처음에는 재밌었던 프로그램들이 지겨워졌고, 시설에 ‘오래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갈 곳은 없었지만, 혜랑 님은 시설에서 모은 200만 원을 가지고 이른 새벽 시설을 몰래 빠져나왔다. 어두컴컴한 길을 걸어 나오면서 두려움이 들었지만 ‘지긋지긋한’ 시설 생활을 뒤로하며 후련함을 느꼈다.
“나중에는 지긋지긋해지는 거예요. 음악 치료도 처음에는 재밌어요. 이제 어느 순간에는 노래도 안 부르고 이러고 있는 거예요. ‘선생님 노래 부르세요’ 그러면 막 또 불러야 돼요. 미술 치료도 지겹고, 종이접기도 지겹고, 또 그거 에어로빅인가? 처음에는 막 이렇게 했는데 또 점점 흥미가 잃어가더라고요. (시설을 나올 때 마음이) 좀 무거운 것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후련했어요. 거기 매여 살다 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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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시간 뒤에
찾아온 위기
갈 곳이 없던 혜랑 님은 고시원을 전전했다. 수중의 돈은 금세 사라졌고 또다시 머물 곳을 찾아야 했다. 휴대폰으로 여성 노숙인 쉼터를 검색해 여러 곳에 전화를 해봤지만 혜랑 님이 머물 수 있는 곳은 없었다. 마지막으로 시설에 있을 때부터 알고 있었던 열린여성센터에 전화를 했다. 그곳에는 자리가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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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생활을 시작했을 때는 그곳의 분위기가 몹시 낯설었다. ‘군대식’ 생활을 하는 시설과 다르게 너무도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자유가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좋았다.
“거기는 이제 가서 놀랐어요. 시설은 거의 군대식으로 규칙적인데, (열린여성센터는) 외박도 한 달에 6번 할 수 있고 자유로운 거예요. 남자친구를 만나도 되고, 핸드폰을 가지고 다녀도 되고, 종교도 자유고. 와 이해가 안 가더라고. 센터가 이래? 술도 마실 수 있고. 그 대신 술 먹고는 깨고 들어가든지 찜질방 가서 자고 오든지. 너무 자유로운 곳이더라고요.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은 자활을 할 수 있게끔 잘 만들어놓은 곳인 것 같아요.”
열린여성센터에서 보낸 2년은 ‘행복한 시간’이었다. 센터의 언니, 동생 들과 가깝게 지냈고, 센터가 운영하는 카페에서 일을 도우며 바리스타 자격증도 취득했다. 또한 센터에서 연결해준 일도 했는데, 열린여성센터를 의지하고 신뢰했던 혜랑 님은 센터에서 소개해준 일이라면 무엇이든 최선을 다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힘든 사건을 겪고 센터를 나오게 되었다. 처음에는 일자리를 구할 생각이었지만, 낯선 사람들과 함께 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결국 혜랑 님은 고시원에서 생활하며 수중에 있던 200만 원을 모두 써버렸다.
생활비가 떨어진 혜랑 님은 신용카드를 쓰기 시작했고, 결제를 거듭하다 빚을 안게 됐다. 파산 위기에 놓인 혜랑 님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때 열린여성센터의 한 팀장님이 찾아와 도움을 주고, 센터로 돌아올 것을 권했다. 막막하던 그때 자신의 손을 잡아준 팀장님이 혜랑 님은 고마웠다. 지금도 자신이 그 위기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 팀장님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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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탄치 않았던 자립
센터에서 생활한 지 2년여가 되었을 때 혜랑 님은 자립을 결심했다. 그리고 센터 선생님들의 도움을 받아 매입임대주택을 얻어 자립 생활을 시작했다. 처음 자신의 집을 갖게 된 혜랑 님은 기대를 안고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기대와 다르게 순탄치 않았다. 집은 높은 언덕 위에 있어 오고 가기 힘들었고, 방음이 잘 안 되는 열악한 환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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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경사가 무슨 산 타야 돼요. 집이. 무슨 이건 지리산도 아니고요. 못 살겠어요.”
“옛날 빌라예요. 창문이 드르륵거리는 그런 빌라고. 옆집 말하는 소리 다 들리고. 막 아빠랑 딸이랑 맨날 싸워요. 둘이 사는데."
결국 5개월 정도 생활하다 다른 지역에 있는 매입임대주택으로 주거 이전을 했다. 하지만 그곳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열악한 환경과 이웃과의 갈등 때문에 힘든 시간이 이어졌다. 이웃집 남자로부터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언제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매번 휴대폰 카메라를 켜고 집을 나서야 했다. 공포스러운 시간이었다. 가끔 같은 건물에 사는 아는 언니를 만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혼자 보냈다. 스트레스로 잠을 잘 못 자고, 음주가 잦아지면서 건강도 나빠졌다.
바라던 자립을 이뤘지만 매입임대주택에서의 생활은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더 이상 견디기 어려웠던 혜랑 님은 절박한 심정으로 지원주택을 신청했다. 지원주택 입주가 어려우면 고시원에서라도 지낼 생각이었다. 입주자를 선정하는 인터뷰에서 혜랑 님은 자신이 5년간 겪었던 어려움을 토로했다.
“앞집 남자애가 알코올 중독이라 저랑 두 번이나 부딪혔어요. 걔 때문에 살 떨려서 살 수가 없다고. 지원주택 신청하러 갈 때 손이 떨리더라고요. 면접관한테 그런 부분을 다 얘기를 했죠.”
결국 혜랑 님은 지원주택을 얻어 이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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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주택에서
이웃을 만나다
지원주택으로 이사를 온 이후 좋은 일이 많이 생겼다. 마음 편히 의지할 수 있는 코디네이터 선생님들을 만났고, 이웃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으며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 됐다. 혼자만의 시간과 공간을 갖지만 때론 반찬 나누기나 자조 모임을 통해 이웃들과 마음을 나누는 일상이 가능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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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와서 좋은 일이 많이 생겼어요. 건강도 조금씩 되찾고 웃음도 되찾고 좋아요. 그리고 선생님들이 상주하고 계시니까 아프다고 하면 신경을 되게 많이 써주세요. 그 부분도 너무 좋고 이제 여자 선생님들이니까, 여자 대 여자니까 상담하더라도 편하게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점도 되게 좋아요. 되게 신경 많이 써주시고요. 아주 감사해요.”
“매입임대 살았을 때는 거의 혼자 지냈죠. 혼자 지내고 여기 와서는 프로그램 같은 것도 있고 사무실에서 뭐 반찬 나누기, 자조 모임 같은 것도 좋고.”
지원주택에서 새롭게 펼쳐진 일상은 혜랑 님에게 집이라는 공간을 새롭게 인식시켜줬다. 집은 이제 끔찍해서 탈출해야만 하는 공간이 아닌 중요하고 안정감을 주는 공간이 되었다.
“집은요, 예전에는 끔찍한 곳이었는데 지금은 저한테 아주 중요하고 안정을 주고 그런 곳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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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두루두루
돌보는 삶
지원주택에서 발견한 것은 집의 가치 그 이상이었다. 혜랑 님은 지원주택에서 비로소 좋은 삶의 의미를 발견했다. 혼자가 아닌 함께, 두루두루 돌보는 삶, 서로를 통해 배우고 닮아가는 삶을 경험하며, 그러한 삶을 좋은 삶으로 정의하게 되었다.
계속
“원래 내가 좀 사람들 챙기고 나누는 사람이지만 사람들하고 어울리고 같이 살다 보니까 두루두루 같이 챙겨주고, 그게 좋은 거 같아요. 같이 늙어가잖아요. 밑에 언니 50대인데 내가 50 먹으면... 하여튼 그런 게 좋은 것 같아요. 저는 여기 밑에 언니 보고 너무 많이 배워요. 사람이 너무 착해요. 공중도덕도 잘 지키고 배려를 많이 해요. 내가 존중 받으려면 남을 먼저 존중해줘야 하잖아요. 그런 마인드로 생활하고 있어요.”
혜랑 님은 ‘좋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 지원주택의 지원 프로그램들을 통해 운전면허를 취득했고, 최근에는 운동을 시작했다. 10대 시절부터 음악과 디제잉을 좋아했던 혜랑 님은 이제 지원주택에서 자신만의 좋은 삶을 연주해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