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lease ensure Javascript is enabled for purposes of website accessibility

이제의 님의 이야기

새롭게 좋을 날을 꿈꾸기 위해



🧘

좋은 삶 | 꿈

그냥 아프지 않고 그런 게 좋은 삶인 것 같아요. 아프지 않고 좀 가벼운 마음으로 생활할수 있는 것.

이제의 님은 최근까지 나이를 속여가며 건설 현장에서 일했지만, 건강이 나빠져 더는 일자리를 구하기가 어려워졌다. 돈이 없어 보증금에서 월세를 까다가 집을 나오게 됐다. 지원주택은 주민센터에서 소개해줬다. 입주하기로 결정하고는 딸의 도움을 받아 보증금을 냈다. 딸은 냉장고와 세탁기까지 장만해줬다. 머물 집이 있으니 비로소 안정된 마음이 든다.
“젊었을 때는 나름대로 열심히 했다고 생각”한다. 제의 님은 1949년 서울에서 태어나 전쟁통에 가족들과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 국민학교 1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고는 누나와 함께 서울로 돌아와 중랑교 아래 오두막집에서 살았다. 신문 배달도 하고 비 오는 날 우산도 팔다가 검정고시를 치르고 늦깎이로 고등학교에 들어갔다. 상대 입학을 목표로 했으나 결국 낙방해 학업을 접었는데, 군대 전역 후 시작한 피복 장사가 소위 말해 대박을 쳤다. 월급이 5만 원 정도일 때 하루에 70만 원을 벌었다. 눈코 뜰 새 없이 일만 했다. 주위를 둘러볼 여유가 있을 리 없었다.
거래처 직원이던 아내와 결혼해 딸 하나 아들 하나를 낳았다. 날로 번창하기만 하던 사업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경리 직원의 횡령 사실을 발각하고서다. 결국 사업을 접었다. 빚을 갚으려고 집을 처분해 네 가족은 좁고 열악한 곳으로 거처를 옮겨야 했다. 일용직 노동으로 근근이 생계를 꾸려가며 이리저리 옮겨 다니다가 50대 후반부터는 가족과 떨어져 혼자 살기 시작했다.
아직까지 마음 한편에는 호시절의 기억이 생생하다. 고된 하루하루였지만 거상이 됐다는 자부심이 대단히 컸기 때문이다. 그런 시절을 뒤로하자니 지금도 가슴이 쓰리다. “과거의 내 삶은 다양하고 힘들고 좋은 일도 많았지만” 그래도 “뭐 어쩌나” 하며 씁쓸한 웃음을 지어 보인다. 앞으로 세월은 걱정거리 없이, 아프지 않고 살면 좋겠다. 지금 생활에 만족하고 앞으로 20년은 지원주택에서 살 수 있지만, 그래도 언젠가 ‘나의 집’을 갖고 싶다. 그것이 소원이다.

1

국민학교를 그만두다

이제의 님은 194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가족들과 고향을 떠나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 아버지 없이 어머니 혼자서 3남 4녀를 키웠다. 어린 나이라 기억이 잘 나진 않지만, 부산에서의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가난한 형편에 어머니는 장을 돌아다니며 장사를 해 생계를 이어갔다. 그 시장은 친구들과 뛰노는 놀이터이기도 했다. 국민학교에 들어갔지만 가정 형편 때문에 오래 다닐 수 없었다. 1학년 생활을 두 달쯤 하고 학교를 그만뒀다.

얼마 뒤 서울로 다시 거처를 옮겼다. 누나와 함께 중랑교 아래 오두막집을 마련해 어렵게 생활했다. 생계를 위해 13살 때 신문 배달을 했다. 비 오는 날에는 우산을 팔기도 했다. 그땐 그 일들이 힘든 줄 몰랐다. 17살이 된 제의 님은 교복을 입고 등교하는 또래들의 모습이 좋아 보였다. 늦었지만 학교에 다시 가고 싶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교육 과정을 속성으로 가르치는 고등국민학교를 다녔다. 그렇게 검정고시를 치르고 고등학교에 들어갔다. 동급생보다 두 살 더 많았지만 친구들과 잘 어울려 지냈다. 상대에 입학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열심히 공부했다.


2

피복장사를 시작하다

상대에 지원했지만 낙방한 이제의 님은 학업을 접고 일을 시작했다. 남대문에 위치한 피복 공장에 들어갔다. 일은 시간 개념을 잊을 정도로 많았다. 밤 12시, 심지어 새벽 2시까지도 일하는 날이 잦았다. 그러다가 23살에 입대했고 26살에 전역했다. 피복 공장에서 일했던 것이 계기가 되어 전역 후 남대문에서 피복 장사를 시작하게 됐다.

계속

20대 중반, 이른 나이였지만 시장에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사업은 잘됐다. 29살이 되던 해 거래처 직원이던 전 아내와 연애 결혼을 했다. 아내와 함께 피복 사업을 해나갔다. 사업이 번창해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매일같이 새벽 4시에 일어나 일했고, 한 달에 하루나 이틀밖에 쉴 수 없었다.

“한 달에 하루나 이틀이나... (밖에 쉬지 못했다.) 새벽 장사니까. 새벽에 4시부터 하니까.”


3

기억하고 싶은 시간

어느새 남대문과 동대문을 아울러 피복을 가장 많이 팔 정도로 사업이 커졌다. 비록 일은 고됐지만 큰 자부심을 느꼈다. 이제의 님의 공장은 피복을 잘 만드는 곳으로 주변에서 인정받았다. 당시의 내로라하는 큰 회사들과도 많이 거래했고, 멀리 제주도와 울릉도에서도 피복을 사러 오곤 했다.

계속

30대에는 일이 삶의 전부였다.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고된 하루가 반복됐지만 날로 번창하는 사업을 바라보며 내일을 견딜 힘을 얻었는지도 모른다. 많은 것을 이룬 만큼 많은 것이 스쳐 지나갔다. 그래도 30대는 여전히 인생에서 가장 기억하고 싶은 시간으로 남아 있다.

“그냥 장사 일만 신경 썼지, 다른 것에는 별로.”


4

사업을 정리하다

번창하던 사업에 갑작스럽게 위기가 들이닥쳤다. 돈 관리를 담당하던 경리 직원의 횡령이 발단이었다. 결국 사업을 접어야 했다. 20대와 30대를 오롯이 바친 일이었다. 자부심을 갖고 일하던 공장을 정리하면서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슬퍼하는 것도 잠시, 눈앞에 펼쳐진 현실과 마주해야 했다.

계속

빚을 갚기 위해 집을 처분해 당장 네 가족이 살 곳이 없었다. 어렵게 구한 집은 네 가족이 살기 어려운, 매우 열악한 환경이었다. 당장 생계를 잇기 위해 일을 구해야 하는 것도 문제였다. 평생 피복 공장에서 일해온 이제의 님이었다. 피복 일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는 수 없이 일용직 노동을 하며 생계를 꾸렸다. 3년 반 동안 두 차례 이사했다. 보증금을 낼 돈이 모자라 월세를 높이는 조건으로 집을 구하기도 했다.


5

집을 잃다

제의 님은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면서 50대 후반에 가족과 떨어져 혼자 살기 시작했다. 집을 옮겨다니기를 여러 차례, 이제의 님이 살았던 집들의 환경은 좋지 않았다. 사업을 정리하면서부터 시작한 일용직 노동으로 근근이 벌이하며 생활했다. 생계를 꾸리는 일은 쉽지 않았다. 돈이 없어 보증금으로 월세를 지불해야만 했다. 오래지 않아 집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6

지원주택을 만나다

이제의 님은 주민 센터에 찾아가 갈 곳이 없는 상황을 털어놓았다. 주민 센터에서는 임대료가 저렴한 곳이 있다며 지원주택을 소개해줬다. 달리 갈 곳이 없던 터라 지원주택에 연락했고, 직접 찾아가 답사했다. 답사를 마치고 그곳에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계속

“그 (전에 살던) 집은 첫째, 깨끗하지 않았어요. 너무 옛날 집이어서 바퀴벌레가 많이 나와가지고.”

“(지원주택은) 깨끗하고 그러니까.”

지원주택으로 이사를 올 때 딸의 도움을 받았다. 딸은 떨어져 살지만 이제의 님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딸이 보증금을 대신 내주고 세간도 장만해줬다. 그런 딸에게 늘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다. 이제의 님은 지원주택에서 보내는 현재의 삶에 만족한다.

“네, 만족해요. 모든 부분이 이 정도는 뭐, 살만하다. 뭐 아주는 아니지만 살만한 데예요.”

하지만 경제적인 고민이 남아있다. 최근까지 나이를 속여가면서 일용직 노동을 했지만, 건강이 나빠져 더는 일자리를 구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7

마음이 편한 
‘나의 집’

이제의 님은 언젠가 ‘나의 집’을 가지고 싶다. 지금 생활에 만족하고 앞으로 20년은 지원주택에서 살 수 있지만, 그래도 언젠가 ‘나의 집’을 갖고 싶다. 그것이 이제의 님의 소원이다.

계속

“살면서 내 집이 없으니까 굉장히, 집 갖는 게 소원이라 그럴까? 요즘 임대 아파트 같은 거 많이 나오잖아요. 그런 정보를 모르니까...”

“우선 내 집이니까 마음이 편한 게 최고지.”

이제의 님은 가능하다면 임대 주택을 구하고 싶다. 하지만 관련 정보를 얻기가 쉽지 않다. 주민 센터를 통해 차근차근 알아보려고 한다.


8

과거를 뒤로하고
그려보는, 좋은 삶

이제의 님의 마음 한편에 자리잡은 기억이 있다. 고된 하루하루였지만 사업이 날로 번창하던 호시절을 잊지 못한다. 그런 시절을 뒤로하고 일을 그만뒀을 때 마음이 아팠다.

계속

“아 마음, 지금도 뭐 아프지.”

그 아픔은 지금도 유효해서 길을 걷다가 과거에 거래했던 회사를 보면 추억에 빠져들기도 한다. 삶의 전부였던 일을 더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다시 한번 좋은 삶을 꿈꿔본다.

“좋은 삶, 뭐라 그래야 되나? 아프지 않고 그런 게 좋은 삶인 것 같아요. 아프지 않고 좀 가벼운 마음으로 생활할 수 있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