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찬 님의 이야기
세상을 산책하기, 삶을 새로 쓰기
좋은 삶 | 꿈
여행갈 때가 좋아요. 풍경, 바깥, 풍경도 보고. 그리고 산도 보고. 그리고 꿈이 있다면 돈을 벌어서 고향에 제 집 사는 거예요.
- 일상을 공유하고 신뢰를 쌓는 돌봄 관계 👥
- 소박하더라도 성취의 기쁨을 주는 일 💼
- 편히 쉬고 환대할 수 있는 삶의 공간 🏠
- 풍경과 자연을 즐길 수 있는 여행 🚞
- 활동에 무리없는 물리적 환경이 있는 동네 🌈
- 고향에 집을 마련할 수 있는 재정 💰
- 일상을 공유하고 신뢰를 쌓는 돌봄 관계 👥 소박하더라도 성취의 기쁨을 주는 일 💼 편히 쉬고 환대할 수 있는 삶의 공간 🏠 풍경과 자연을 즐길 수 있는 여행 🚞 활동에 무리없는 물리적 환경이 있는 동네 🌈 고향에 집을 마련할 수 있는 재정 💰
“막상 용기를 내서 독립하고 나니까 자유롭고 편안하고, 간섭받지도 않고. 그리고 자유롭게 혼자서 제가 살던 북가좌동에도 가보고... 손님이 와서 자고 갈 수도 있고. 그게 조금 좋았던 거 같아요.”
“막상 용기를 내서 독립하고 나니까 자유롭고 편안하고, 간섭받지도 않고. 그리고 자유롭게 혼자서 제가 살던 북가좌동에도 가보고... 손님이 와서 자고 갈 수도 있고. 그게 조금 좋았던 거 같아요.”
집이라고 하면, 과거 가족과 함께 살던 서울시 은평구 북가좌동의 집과 현재 자립해서 혼자 살고 있는 지원주택이 떠오른다.
첫 번째 집과는 스무 살에 이별을 했다. 네 살 때 뇌성마비, 늑막염, 소아마비에 걸린 이용찬 님은 여덟 살 때 교통사고로 머리를 다쳐 학교에 다니지 못했다. 아버지와 동생이 먼저 하늘로 떠나고, 어머니가 미국으로 이민 간 누나를 뒤따르면서 용찬 님은 경상북도 김천에 있는 한 시설로 보내진다. 그곳이 지옥과 다름없는 무허가 시설인 줄은 아무도 몰랐다. 원장 부부에게 비인격적인 대우를 받으며 무려 20년 동안 그곳에 감금된다.
이후 췌장암 선고를 받고 귀국한 어머니와의 재회 덕분에 그 시설에서 겨우 벗어나지만, 3개월 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도란도란’이라는 다른 시설로 옮겨진다. 그곳에서는 김천 시설과 달리 자유롭게 일도 하고 돈도 벌 수 있었다. 방이 3개인 집에서 4명이 함께 사는 체험홈 생활을 했는데, 나이 차가 많이 나는 동거인들에게 알 수 없는 이유로 따돌림을 당했다. 그런 고충을 털어놓을 선생님조차 없어 더욱 힘들었다.
시설에서 나가겠다는, 나가서 자립하겠다는 생각에 힘을 실어준 이는 김치환 복지사다. 지원이 전부 중단될 거라고 협박하는 원장을 뒤로하고, 용찬 님은 그곳 생활을 10년 만에 끝낸다. 두려웠지만 굳게 마음먹고 밖으로 나섰다. 도합 30년, 빼앗긴 세월과 짓이겨진 마음이 무게 추가 되어 발목에 걸렸지만 용찬 님은 힘찬 걸음을 옮겼다. 2020년 4월 1일, 난생 처음 스스로의 의지로 살 곳을 정한다.
지원주택에 입주한 첫날은 든든한 지원자인 김치환 복지사와 함께 지냈다. 실감이 안 됐지만 차츰 적응했다. 무엇보다 손님이 ‘내 집’에 묵고 갈 수 있다는 사실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자유롭고 편안해진 일상 속에서 용찬 님은 과거를 다시 마주한다. 여전히 불쑥불쑥 떠오르는 기억들에 괴롭지만, 이제 누군가에게 소리 내어 얘기할 수 있다. 용찬 님만의 속도와 높이로. 그러니 꿈 속에서 과거와 현재가 여러 겹으로 포개진다.
1
가족과 함께해
행복했던 20년,
아버지와 동생을
잃다
“방구석에서 텔레비전 보고 가끔씩 밖에 나와서 동네 한 바퀴 돌고... 용돈도 주고, 누나가. 군것질하고, 그리고 동생 조금씩 주고... 북가좌동에서 여의도까지 저는 걷고 동생은 롤러스케이트 타고.”
계속
이용찬 님은 1969년 은평구 북가좌동에서 태어나 누나와 형, 그리고 동생과 함께 자랐다. 4살 때 뇌성마비, 늑막염, 소아마비에 걸려 주로 집에서 TV를 보며 시간을 보냈고 이따금 동네를 산책했다. 지금도 고향의 예전 모습과 이후 점차 달라진 모습을 또렷이 기억한다. 8살 때 교통사고로 머리를 다쳐 학교에 다니지 못했다. 방직 공장에서 일하던 누나가 한글을 가르쳐주고 가끔 용돈을 주기도 했다. 그 돈으로 동생과 함께 군것질을 했다. 동생과 걸어서 여의도까지 놀러 가기도 했다.
아버지는 가정집에 연탄 보일러 설치하는 일을 했는데, 용찬 님이 10살쯤 됐을 무렵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동생은 용찬 님이 20살이 되어 시설로 들어가기 바로 전날 친구들과 지리산에 놀러 갔다가 익사 사고를 당했다. 가족과 함께 보낸 20년, 나름 행복했던 삶은 어머니와 헤어져 김천의 한 시설로 들어가면서 끝이 났다.
2
윗동네, 아랫동네*
에서의 20년,
인간다운 삶을 잃다
경상북도 김천에 있는 무허가 시설로 들어가게 된 사연은 기가 막히다. 미국으로 이민을 간 누나가 가족들을 초청했고, 어머니는 거기에 응하기로 했다. 용찬 님은 자신만 시설에 들어가기로 결정하면 어머니가 마음 편히 미국에 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미국에 따라가겠다고 하지 않았고 시설에 가기 싫다는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았다.
계속
“(모두 미국에 가면 혼자 남아 외로울 것 같았지만) 저만 희생하면 된다고 봤으니깐.”
전화로 시설에 대한 안내를 받을 때는 분명 침대도 있고 텔레비전도 있다고 들었다. 시설에 들어가던 날 어머니, 외삼촌, 그리고 친삼촌 두 명과 동행했다. 시설 측은 거주 공간이 뒤쪽 건물에 있다면서 보여주지 않았다. 가족들이 떠나자 용찬 님은 어떤 방으로 옮겨졌는데, 알고 보니 우사를 개조한 곳이었다. 장판도 깔려 있지 않은 바닥에서 침구 없이 자야 했다.
그곳에서 산 20년, 인간다운 삶은 없었다. 원장 부부는 밤이면 바깥에서 방문을 걸어 잠그고 용변 바가지를 하나씩 머리맡에 두고 자게 했다. 겨울이면 얼마나 추운지 바가지 안에서 용변이 얼었다. 음식은 형편없었고 고깃국이 나오면 힘센 사람들이 고기를 다 가져갔다. 원장 부부는 시설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인격을 무시하고 시험했다.
"그때는 하도 먹지를 못했기 때문에 배가 달라붙었고. 과자 부스러기 놓고 서로 먹겠다고 싸우고 그랬었고. 처음에 간 시설은 원장 부부가 다 짜고 절 시험하고. 원장 부부가 남녀 성(관계 장면)을 보여주면서 막 (제가) 어떡하나 보고. 그리고, 먹을 거를 일부러 버려요. 그걸 주워 먹나 안 먹나 보고. 거기는 바깥세상하고 완전히 차단됐고. 대통령이 바뀌어도 전혀 모르고 있었고. 날짜 가는 것도 몰라요. 달력이 없고... 그리고 고깃국을 끓여주면 힘센 사람이 고기 건더기만 골라서 들고 가고, 식판도 플라스틱으로 돼서 바닥에 시커먼 때가 달라붙어서는 수저로 긁으면 그게 긁혀서 다 밥이랑 섞였는데 그냥 먹고.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했다. 가족들과 연락을 못 하게 막았고, 연락을 하더라도 비참한 생활을 입 밖에 내지 못하게 했다. 그런 와중에 1년에 한 번씩은 가족이 방문할 수 있었다. 가족이 찾아오지 않으면 만만하게 보고 더 열악한 방으로 보냈다. 외삼촌이 세 차례 방문했는데, 용찬 님이 나가고 싶다는 얘기를 꺼내지 못하게 매번 옆에서 감시했다.
* 용찬 님은 김천의 시설이 무허가였을 때를 “윗동네”라고 부르고, 허가받은 이후를 “아랫동네”라고 불렀다.
3
다시 가족의 품으로,
그리고 또다시
시설로
끝이 보이지 않던, 김천 시설에서의 20년을 마감하게 된 것은 외삼촌 덕분이었다. 외삼촌은 방문할 때마다 용찬 님을 퇴소시키겠다고 했지만 매번 시설 측에서 강하게 반대했다. 세 번째 방문한 날도 용찬 님을 데려가겠다고 해서 시설 측과 크게 싸우다가, 용찬 님 손을 잡고 차에 태워 그길로 시설을 떠났다. 그렇게 하루하루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시설 생활이 끝났다. 용찬 님은 너무도 야윈 자신을 못 알아보는 어머니와 재회했다.
계속
“(나가고 싶다고) 얘기하려고 하면 옆에서 직원들이 듣고 있었고, 감시했고... 가족들이 데리고 나가고 싶어도 직원들이 발작해서 못 데리고 나간다고 그 말만 하면은 가족들이 그냥 가요.”
“(외삼촌이) 직원들하고 대판 싸우고 절 억지로 손 잡고 차에 태워서 나왔고요. 좋았죠. (성공할 거라고) 생각지도 못했고. (직원들이) 발작해서 (가족을) 그냥 돌려보내고 먹을 것만 주고 하는 것도 봤고. (안에 있는 사람이) 노발대발하니까 가족한테 또 연락해서는 오라고 해서 얼굴만 보여주고 돌려보내고 그런 것도 봤고...”
외삼촌이 용찬 님을 기어이 데리고 나온 건 어머니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미국에서 향수병이 깊어졌고, 당뇨가 심해지고 췌장암 선고까지 받은 뒤 귀국했다. 20년 만에 재회한 순간 어머니는 비쩍 마른 용찬 님을 알아보지 못했다. 어머니는 용찬 님과 함께 살면서 약 3개월간 암 투병을 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장례를 치른 날 곧바로 누나, 매형과 함께 도란도란*을 찾았다. 시설에서의 삶이 다시 시작됐다.
* 대한성공회 서울교구 사회복지 재단 ‘함께 사는 세상’ 산하의 지적장애인 생활 시설.
“조금밖에 같이 못 살고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엄마 화장한 날, 그날 도란도란으로 누나랑 매형 따라서 왔고. (엄마랑 같이 살 때) 조금 좋았죠.”
4
더 나은 시설의
한계를 경험하다
도란도란은 비인격적인 대우를 받으면서 지냈던 김천 시설과 많이 달랐다. 예상과 달리 자유롭게 일도 하고 돈도 벌었다. 단체 활동이긴 했지만 기관이 운영하는 텃밭에도 가고 복지관에서 여러 가지 공예 작업도 할 수 있었다.
계속
“처음에는 자유롭게 바깥을 못 나간다고 생각했고, 들어가보니까 자유롭게 일도 하고 돈도 벌고... 조금, 음. 불안 반, 걱정 반. 왜냐면 김천 같은 시설이 서울에도 있을까 봐 조금은 불안했고...”
도란도란에는 20여 명이 공동으로 거주하는 시설, 그리고 자립 생활을 준비하기 위한 체험홈*이 있다. 용찬 님은 체험홈에서 생활했다. 보통 한 집에 5명쯤 살았고 방 하나를 2명 정도가 함께 사용했다. 용찬 님은 방이 3개인 집에서 다른 4명과 함께 지냈고 방은 혼자 썼다. 자신만의 방을 가지게 된 건 자의도, 다른 이들의 배려도 아니었다. 동거인들은 나이가 지긋했는데, 알 수 없는 이유로 용찬 님을 따돌렸다. 그들이 술을 마시고 소란을 피워서 이웃들이 민원을 넣기도 했다. 힘들었지만 주변에 고충을 들어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 자립을 원하는 재가 장애인 혹은 시설 거주 장애인이 일정 기간 머물며 생활하는 주택으로, 장애인이 스스로 삶을 관리하고 주도하며 사회 활동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지역 사회 내에서 자립하기 위한 경험을 쌓도록 돕는다.
“다른 사람들은 절 멀리했고, 다가가면은 오지 못하게 하고. 저만 따돌림당하고... 제 말을 들어줄 선생님도 없었고.”
용찬 님은 처음 도란도란에 입소할 때 원장이 ‘자립해서 시설에서 나가야 한다’고 했던 것을 또렷하게 기억한다. 일단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장년층 동거인들과 생활하는 것이 어려웠다. 더구나 음주 문제로 고생하던 동거인이 경찰차에 실려 귀가한 이후 병원에 강제 입원되는 사건을 지켜보고 나니, 시설을 나가고 싶다는 바람이 한층 커졌다. 이런 생각에 힘을 실어준 이는 김치환* 복지사다. 김 복지사는 여러 가지 지원을 받으면서 자립할 수 있다고 알려줬다.
* 도란도란에 살던 17명의 탈시설을 도운 사회복지사로, 현재는 탈시설 협동조합 ‘도약’을 만들어 활동 중이다.
용찬 님이 나름대로 결심하고 자립 의사를 밝히자 원장의 태도가 달라졌다. 자립하면 도란도란과는 완전히 연을 끊는 것이고 지원도 전부 중단된다고 협박했다.
“자립해야겠다고 마음먹었고, (원장한테 얘기했더니) 원장이 자립해 나가면 도란도란 시설하고 단절이 되고, 지원도 안 해준다고 못 하게 막았고. 처음엔 망설였어요. 원장이 지원이 다 끊긴다고 겁을 주고. 독립을 해야 하나 아니면 시설에서 살아야 하나 많이 혼란스러웠고...”
원장의 말을 듣고 나니 자립이 망설여졌다. 가족이 모두 해외에 있는 용찬 님에게 도란도란은 타인과 관계 맺고 사회생활을 펼친 유일한 장이었다. 일도 여가 생활도 상담도 전부 도란도란을 통해 제공받거나 연결됐다. 도란도란과 단절된다는 것은 모든 것과 단절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럼에도 용찬 님은 “자립해야겠다고 마음먹고” 김치환 복지사를 비롯한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아 2020년 4월 1일 시설을 나왔다. 김천의 시설에 들어가고 나온 것도, 도란도란에 들어간 것도 의지와는 무관한 일이었다. 그러나 도란도란을 나온 것만큼은 용찬 님의 의지가 바탕이 됐다. 난생 처음 스스로의 의지로 살 곳을 정하고 자립 생활을 시작했다.
5
나만의 집이 생기다
용찬 님은 현재 비공급형 지원주택*에서 생활한다. 도란도란에서 10년을 보낸 뒤 독립하고 나자 아주 오랜만에 자유롭고 편안한 기분을 느꼈다. 자립 첫날은 김치환 복지사와 함께 하룻밤을 지냈다. 이렇게 누군가가 자신의 집에서 하루 묵을 수 있다는 사실도 무척 마음에 든다.
* 본인의 집에서 주거 서비스만 지원받을 수 있는 사업으로, 공급 일정 및 지역에 제한이 있는 공급형 지원주택의 한계점을 보완한 것이다.
계속
“막상 용기를 내서 독립하고 나니까 자유롭고 편안하고, 간섭받지도 않고. 그리고 자유롭게 혼자서 제가 살던 북가좌동에도 가보고... 손님이 와서 자고 갈 수도 있고. 그게 조금 좋았던 거 같아요.”
자립하면서 도란도란 복지사의 도움으로 가구도 구매하고 집안도 꾸몄다. 매일매일 활동지원사의 도움을 받아 출퇴근한다. 집안일을 챙겨주는 활동지원사와 날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지원주택 연계 서비스를 담당하는 충현복지관의 복지사도 일주일에 한 번 꼭 용찬 님을 방문해 함께 대화를 나눈다. 김치환 복지사도 자주 찾아와 용찬 님을 격려하고 일상을 살펴봐준다.
용찬 님은 권리 보장형 일자리에도 참여하고 있다. 도란도란에 살 때는 장애인 복지관에서 콘센트를 조립하거나 청소를 했고, 대형 마트에서 박스를 접거나 식용유를 포장하기도 했다. 조립을 하면서는 손으로 뭔가를 만들어내는 것이 기분 좋았고, 강도가 어느 정도 있는 일을 해낸다는 데서 보람도 느꼈다. 슈퍼마켓 점원이나 바리스타 일도 해보고 싶어 사회복지사에게 말해봤지만, 용찬 님이 하기에는 어려우리라는 대답만 들었다. 지금은 하는 일이 많이 달라졌다. 장애인 권리 보장을 외치는 시위에도 참여하고 앞으로는 뮤지컬을 만드는 작업도 해볼 계획이다.
“(시위에 참여했을 때) 처음에는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쳐다보고, 조금 동물원 원숭이처럼 느껴졌었고요. 많이 익숙해지니까, (용찬 님 특유의 정지 후 ‘이제 괜찮다’는 의미로) 그래요.”
용찬 님에게 집이라고 하면, 과거 가족과 함께 살던 은평구 북가좌동의 집과 지금 사는 집이 떠오른다. 이제 귀가하면 편하게 쉬면서 자유롭게 지낼 수 있다. 손님을 초대할 수도 있고 손님이 자고 갈 수도 있다. 용찬 님에게 집이란 자신이 편안하고 자유로운 공간이면서 누군가를 환대할 수 있는 곳이다. 그래서 손님이 오면 시원한 음료수나 따듯한 커피를 대접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어려서 가족끼리 모여서 살았던 집. 일 갔다가 와서 편안하게 쉴 곳. 그리고 혼자서 다 해서 먹고 하는 곳.”
용찬 님은 행운을 상징하는 네잎클로버를 발견하는 데 엄청난 재능이 있다. 풀숲을 쭉 둘러보면 바로 보인다. 그렇게 해서 집으로 가져온 네잎클로버는 코팅지를 발라 보관해둔다. 누군가 집을 방문하면 꼭 보여주고,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는 하나씩 잘라서 주기도 한다.
용찬 님이 가장 좋아하는 건 여행이다. 20여 년의 세월, 너무나 오랫동안 어딘지도 모를 김천의 시설에 살아서 그런지 차창 밖으로 스치는 풍경을 보는 걸 무척 좋아한다. 도란도란에서 가장 좋았던 기억도 여행을 갔던 일이고, ‘좋은 삶’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것도 바깥 풍경이고 자연이다.
“(도란도란 시절 기억에 남는 일은) 여행 갔을 때... 풍경. 바깥. 풍경도 보고, 산도 보고.”
“20년 동안 김천 시설에서 바깥 구경도 못 해봤고, 그리고, 음. 날짜 가는 것도 전혀 알 수 없어서...”
6
자신의 의지로
새롭게
구성해나가는 삶
자유롭고 편안해진 일상 속에서 용찬 님은 과거를 다시 마주한다. 가족과 보낸 어린 시절이 생각나 은평구 북가좌동에도 가봤다. 물론 좋았던 기억만 떠오르는 것은 아니다. 도란도란에서 지내다 자립을 하는 과정에서 도움을 준 김치환 복지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던, 김천 시설에서의 생활이 자꾸 떠오른다. 그곳에 다시 가보고 싶었다.
계속
김치환 복지사에게 간절히 부탁해 자립하고 1년이 지난 시점에 김천을 방문했다. 용찬 님이 살던 시절의 ‘중생원’이라는 이름은 없어지고 시설 형태는 정신요양원으로 바뀌었다. 한 직원이 용찬 님을 알아봤다. 이름도 달라지고 리모델링도 새로 했지만 과거에 일하던 직원도, 용찬 님과 함께 생활하던 무연고자도 여전히 그곳에 남아 있다고 들었다.
활동지원사나 김치환 복지사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억울했던 기억들이 다시 떠오르고 떠오른다. 아무에게도 말한 적 없는 일이 떠오르면 이제 누군가에게 소리 내어 얘기한다. 새롭게 떠오르는 기억이 아직도 많다. 용찬 님은 얘기하고 또 얘기한다. 의지를 짓밟히던 시절에 생성된 기억들은, 용찬 님이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재구성된다. 용찬 님은 자신의 의지로 기억의 공간을 다시 방문한다. 지난날을 마주하고 과거의 기억을 현재의 기억으로 대체하면서, 주체적인 해석을 통해 과거를 새롭게 구성해나간다.
용찬 님에게 자립하기 전의 인생은 잃어가는 시간이었다. 동생도 잃고, 아버지도 잃고, 누나도 잃고 어머니도 잃었다. 그 와중에 가졌던 것이 있다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기 전 용찬 님 이름으로 사놓은 작은 땅이다. 용찬 님은 그 땅을 팔아서 어머니가 빚을 갚는 데 쓰도록 했다. 그게 어린 시절 하면 떠오르는 좋았던 기억이다.
용찬 님에게 꿈이 있다면 은평구 북가좌동에 집을 사는 것이다. 가족과 함께 살던 동네에 스스로의 힘으로 장만한 집을 갖고 싶다. 꿈이 이뤄진다면 용찬 님은 어릴 때 그랬듯 동네 산책을 나가고, 바깥 풍경을 바라보고, 들판에서 네잎클로버를 찾게 되지 않을까. 손님의 방문을 즐기고, 그들에게 새로 찾은 네잎클로버를 보여주지 않을지. 그리고 특유의 다정한 톤으로 말하지 않을까. ‘좋아요’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