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화 님의 이야기
씩씩하게 도전하며 유쾌하게 살아가기
좋은 삶 | 꿈
(좋은 삶을 생각하면) 하늘. 그냥 마음이 편해지면서 날아가고 싶어요. 또 태양. 뜨겁기도 하고, 뭔가 편안하기도 하고.
- 좋아하는 친구와 한 집에 사는 자립생활 👥
- 사람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는 일터 🍳
- 자유롭게 여행 다니는 삶(바다여행 가기) 🚌
- 우울을 이겨내게하는 친구,동료들의 응원 💐
- 자유롭게 오가고 마음껏 꾸미는 내 공간 🏠
- 어려워도 결국 해낼 수 있는 도전 과제 🔥
- 휴식할 수 있는 여유 😎
- 스스로를 아끼고 존중하기 ✨
- 좋아하는 친구와 한 집에 사는 자립생활 👥 사람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는 일터 🍳 자유롭게 여행 다니는 삶(바다여행 가기) 🌊 우울을 이겨내게하는 친구,동료들의 응원 💐 자유롭게 오가고 마음껏 꾸미는 내 공간 🏠 어려워도 결국 해낼 수 있는 도전 과제 🔥 휴식할 수 있는 여유 💐 스스로를 아끼고 존중하기 ✨
“자립은 행복이다, 자유다. 자유로워서 너무 좋고 모든 걸 할 수 있어서 행복해요.”
“자립은 행복이다, 자유다. 자유로워서 너무 좋고 모든 걸 할 수 있어서 행복해요.”

지원주택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편안하게 느낀 공간이다. 유진화 님은 2살쯤부터 김포의 한 장애인 시설에서 자랐고, 중2가 되면서 가정집 형태의 체험홈으로 이사했다. 함께 시설에서 나와 체험홈을 경험한 친구들과 이곳 지원주택에서 동거를 이어가고 있다. 물론 지금은 자립해서 각자 자기만의 방을 가졌다는 점이 다르다. 진화 님의 방은 사진으로 거의 도배되어 있다. 장나라, 한지민, 옹성우, 강다니엘… 사진 찍는 걸 좋아해 최근 지원주택 커뮤니티룸에서 작은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감옥 같던 시설 생활을 생각하면 지금의 일상이 너무나 소중하다. 그 시절에는 힘든 일이 생겨도 늘 참기만 했다. 지원주택에 온 이후에는 참지 않게 됐다. 꾹꾹 눌러온 감정을 터뜨려도 될 만큼 안전하다고 느꼈다. 입주 시 트러블을 겪어 마음고생을 했을 때도 코디네이터 선생님들에게 돌봄을 받을 수 있었다. 특히 지원주택 운영기관의 센터장과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면서 가까워져 “존경하는 분”이라고 서슴없이 말하는 사람이 됐다.
진화 님은 고3 때 학교에서 현장 실습으로 연계해준 한식 뷔페에서 처음으로 임금 노동을 시작했다. 돈벌이도 돈벌이였지만 “시설 바깥의 특이한 사람들”을 동료로 두고 함께 노는 게 재밌었다. 그곳에서 3년 동안 일하며 성취감과 즐거움을 잔뜩 경험했다. 현재는 피플퍼스트서울센터에서 장애인 당사자 활동가로 근무한다. 집회에 참여하거나 연극을 하기도 하고, 발달장애인 자립생활센터에 가서 자립에 대한 강의도 진행한다. 피플에서는 장애인으로서의스스로를 긍정하며 일할 수 있어서 좋다. 그렇지만 첫 직장 같은 서비스업이 더 적성에 맞다는 게 솔직한 생각이다. 승진해서 돈도 많이 벌고 연차도 자유롭게 쓰고 싶다.
“유쾌하고 재밌고 사람들한테 잘 맞춰주는” 진화 님은 스스로를 행복하게 해주려고도 노력한다. 얼마 전에는 힘든 시기를 지나온 자신에게 스마트워치를 선물로 줬다. 손목에 찬 시계를 자꾸 들여다본다. 거짓말하지 않는 시간이 일정한 속도로 흐른다. 힘든 일이 있어도 포기하지 않고 이 세상을 열심히 살고 싶다. 하다 보면 재미있으면 좋겠다. 그래서 10년 후의 자신에게 미리 기분 좋은 인사를 보낸다. “안녕 진화야! 진화는 10년 후에는 멋있는 삶을 살 거야, 내가 응원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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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설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다
“나가고 싶었어요. 나가서 친구들이랑 떡볶이 먹고. 학교 끝나고 떡볶이 먹고 놀러 가고 그러고 싶었거든요.”
계속
1997년에 태어난 유진화 님은 발달장애를 갖고 있으며, 2살쯤부터 김포의 해맑음마음터*라는 장애인 시설에 살았다. 어떻게 들어가게 됐는지는 알지 못한다. 최초의 기억은 유치원에서 놀이공원에 놀러 갔다가 피부가 많이 타서 감자 마사지를 했던 일이다. 초등학교, 중학교 때도 수련회나 수학여행이 가장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 있을 만큼 친구들과 어울리고 놀러 가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다.
*과거 석암베데스타 재단, 현 프리웰 산하 시설. 2009년에 명칭 변경.
시설에서의 삶은 진화 님이 밖에 나가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도록 막았다. 학교를 마치면 곧장 귀가해야 했고 특별히 하는 일 없이 “가만히 있었”다. 당시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은 방과 후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는데, 중학생이 되어 그룹홈으로 이사하기 전까지 단 한 번도 그래본 적이 없다. 시설 사람들과 다 같이 외출하는 것은 탐탁지 않았다. 시설 이름이 적힌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것이 창피했기 때문이다.
“어디 나가야 된다고 하는데 창피했거든요, 사실. 왜냐면 버스에 시설 이름이 적혀 있거든요. 해맑은마음터라고. 그 버스 타고 밖에 돌아다니니까 뭐가 좀 창피했어요.”
가끔 시설 선생님들 몰래 빠져나가서 편의점에서 간식을 사 왔다. 오후 5시에 저녁 식사를 마쳤는데 시간이 너무 이른데다 식사량도 적어서 밤이 되면 배가 고팠기 때문이다. 취침 시각은 저녁 7~8시경이었다. 잠이 안 와도 그냥 누워 있어야 했다. 아침에는 6시에 일어나 7시에 아침 식사를 했다. 나이대가 다양한 사람들 스무 명 정도가 한 방을 썼다. 씻는 순서와 시간도 정해져 있었다. 복잡하고 까다로운 규칙을 어기면 원장은 벌을 세우고 굶기는 등 처벌을 내렸다. 이유 없이 때릴 때도 많았다. 다른 선생님들에게 도움을 청하고 싶었으나 다들 원장 눈치를 봤기 때문에 어려웠다.
“원장님이 공부하라고 그랬고. 벌도 세우고 그랬어요. 손바닥도 맞고. 밥 안 먹으면 밥도 안 주고 굶기고. 외출도 금지하고 그랬어요.”
원장은 시설 자금을 유용하기까지 했는데, 참다못한 직원들이 국가인권위원회에 신고해 조사를 받았다. 원장이 결국 해고된 것을 보니 아주 “통쾌했다”.
“아싸! 원장님 이제 없다. 이제 불장난(클럽 느낌 나게 전등을 껐다 켰다 하는 것) 해도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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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설에서 한 발짝
벗어나다
중학교 2학년이 된 진화 님은 시설과 같은 재단에서 만든 체험홈(그룹홈)으로 이사했다. 체험홈은 네 명가량이 함께 생활하는 가정집 형태의 주거 공간이다. 둘이서 한 방을 썼다. 이사할 때 짐은 많지 않았다. 사계절 옷을 다 합해야 대여섯 벌이었고 그 외 물건이 몇 가지 있을 뿐이었다. 시설에서 개인 물건은 창고나 개인 서랍장에 보관했는데 수납 공간이 넉넉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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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넣고 싶었는데 작아갖고 못 넣었어요. 과자 같은 것도 숨겨놓으려고 했는데 너무 좁아서 못 넣었어요.”
체험홈으로 이사하면서 학교도 근처의 특수학교로 옮겼다. 한 반에 열셋에서 열다섯 명 정도였고 이 때도 역시 수학여행을 갔던 것이 가장 인상 깊은 기억이다. “열심히 해서 백 점 맞으면 뿌듯하니까” 시험을 앞두고 열심히 공부하기도 했다. 가장 좋아하는 과목은 체육이었고 특히 배드민턴과 피구를 좋아했다.
처음 체험홈에 입주하기로 결정하면서는 두렵고 망설여졌던 게 사실이다. 자립 생활이 무엇인지 모른 채 시설에서 나와야 했기 때문일까. 그러나 이내 시설을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처음에는 무서웠는데 한편으로는 (손동작과 함께) 나이스~! 시설을 벗어날 수 있어서 좋았어요.”
그러나 체험홈도 시설의 영향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았다. 교육을 받거나 건강검진을 할 때마다 시설에 왔다 갔다 해야 하는 점이 싫었다. 씻는 시간은 자유로웠지만 자는 시간은 정해져 있었다. 시설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전한 자립 공간도 아닌 곳이었다. 체험홈에 사는 동안 딱히 자립을 준비한 것은 아니고, 이후에 지원주택에 대해 처음 들었을 때도 그게 뭔지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시설은 싫었지만, 함께 시설에서 나와 체험홈까지 경험한 친구들끼리는 여전히 친하게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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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을 벌다
진화 님은 고등학교 3학년 때 학교에서 현장 실습으로 연계해준 곳에서 처음으로 임금 노동을 시작했다. 나름 큰 규모의 한식 뷔페에서 매장 오픈 및 마감, 홀서빙, 접시 닦는 일을 하루 4시간씩 했다. 오픈과 마감을 도맡다 보니 체력적으로 힘들었다. 휴가를 자유롭게 낼 수 없는 점도 화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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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오픈하고 마감하고 하니까 너무 힘든 거예요, 체력적으로. 힘들다고 말을 하긴 했는데. 연차 같은 것도 달라고 했어요. 근데 안 된다는 거예요. 다른 사람들하고 맞춰야 되거든요, 연차를. 안 된다고 해서 화가 났어요.”
그렇지만 일 자체는 전반적으로 참을 만했고 일단 돈을 번다는 점이 무척 좋았다. 점차 경제적인 주도권을 갖게 된 것이다. 지원주택으로 자립한 이후에는 통장도 직접 관리하게 되면서 경제적으로 책임감도 느낀다.
“돈을 받아서 하고 싶은 거 할 수 있어서 너무 좋고. 먹고 싶은 거나 사고 싶은 걸 여러 가지 살 수 있어서 너무 좋아요. 옛날에는 그런 게 없었거든요. 시설에서 다 관리하고 했는데.”
“통장 관리를 해줬거든요, 시설에서. 그래서 통장에 얼마 있는지 몰랐거든요. 그런데 제가 관리하니까 ‘아 이 정도 있구나, 이만큼 써야 되겠구나’라고 생각을 해요.”
처음에 일했던 지점이 문을 닫고 다른 곳에 매장을 열게 됐을 때, 점장이 그간 진화 님을 눈여겨봤던지 새 매장으로 직접 섭외했다. 나름 일을 잘했다는 인정의 의미였다. 그곳에서는 주방 일을 했다. 전부터 요리를 배우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에 새로운 도전이 마음에 들었다.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고 인정받는 데서 성취감과 즐거움을 경험했다.
“레시피 보고 하는 거. 그게 좀 어려웠거든요. 그거는 외워야 되거든요. 외워서 요리를 해야 되거든요. 그냥 보고만 있으면 안 되니까 몇 개는 좀 외웠어요.”
“처음에는 사람들한테 (음식을 만들어) 준다는 게 너무 좋았거든요. 그런데 갈수록 힘든 거예요. 그래서 아, 뭐 포기를 해야 되나 싶었지. 근데 하다 보니까 재미있었어요. 사람들이 ‘고생이 많네요’ 이런 식으로 말하거든요, 저한테. 그러니까 너무 뿌듯했어요. 맛있다고 해서.”
돈을 버는 것도 좋았지만 일하면서 만난 사람들과 친구가 되는 것도 좋았다. 시설에서 한 번도 챙겨준 적 없는 생일을 직장 동료들이 축하해주기도 했다.
"후회하지는 않아요. 힘들긴 한데 재미는 있어요. 끝나고 애들이랑 끽!(소주잔 꺾는 시늉) 마시고 그랬어요.”
“일할 때 크리스마스 날에 너무 좋았거든요. 크리스마스 때 음악 틀고. ‘We wish you a merry Christmas~’ 그리고 제 생일날에 회사 오빠들이 챙겨줬거든요. 그래서 너무 감동 받았거든요. 회사 언니도 선물 주고 그랬어요.”
계약이 종료되어 그만둘 때까지 3년을 일하고 나니 스물한 살이 됐다.
4
지원주택으로
자립하다
진화 님은 하나의 시설에서 거주하고 자랐으며 그곳에서 형성한 관계를 꾸준히 유지하고 있다. 현재 지원주택에 함께 사는 하우스메이트들과도 어릴 때부터 같이 지내온, 오래된 관계다. 시설에서 나와 체험홈에서 함께 생활하다가 지원주택 정책이 시작되면서 각자의 방이 있는 집으로 이사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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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주택은 진화 님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편안하게 느낀 자신만의 공간이다. 처음 입주했을 때 혼자 방에 있는 기분이 너무 좋고 뿌듯했다. 좋아하는 연예인(장나라, 한지민, 옹성우, 강다니엘) 포스터로 방을 꾸몄다.
“아, 나도 이제 내 시간이 필요하구나. 내 공간이 생겨서 너무 좋구나. 체험홈에 있을 때는 한 방에 두 명씩 있었거든요. 근데 이번에는 방을 혼자서 쓸 수 있으니까 너무 좋았어요. 내 방을 꾸밀 수 있어서 너무 좋아요.”
“옛날에는 집이 있긴 있었는데 그걸 시설에서 관리해주니까 시설 같았고. 지금은 시설이 아니고 관리를 아무도 안 하고 내가 스스로 하니까 너무 좋아요.”
“지금은 나갈 수가 있거든요. 친구들도 만나고 하는데 시설에서는 그런 걸 못했거든요.”
현재는 지원주택에 거주하면서 오전 9시 반에서 오후 2시 반까지 피플퍼스트서울센터(이하 피플)에서 주 5일 일한다. 피플에서 일한 지 어느덧 1년이 넘었다. 퇴근 후에는 활동지원사의 도움으로 식사를 하고 주로 낮잠을 자거나 드라마를 본다. 최근에는 드라마 〈펜트하우스〉를 “본방 사수”했는데, 악역 연기가 마음에 들었다. 그 외 취미 생활은 놀러 가는 것이다. 여행을 자주 가지는 못하지만 바다 보러 가는 걸 좋아한다. 놀러 가면 핸드폰으로 아주 멋진 사진들을 찍는다. 어렸을 때부터 사진 찍는 것을 좋아했는데, 고등학생이 되고 핸드폰이 생기자 언제든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돼서 기뻤다. 최근에는 사진 수업도 들었고 선생님의 도움으로 지원주택 커뮤니티룸에서 작은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고등학교 올라가고 나서 핸드폰이 생겼거든요. 그전에는 핸드폰이 없었어요. 그래서 풍경 같은 것도 못 찍었어요. 그래서 그냥 내 눈으로 다 담아 왔어요.”
진화 님에게 사진을 찍는 일은 스스로에게 선물을 주는 것 같은 일이다. 대부분 풍경을 담는다. 더 멋진 사진을 찍기 위해 여행을 많이 다니고 싶다. 특히 프랑스 파리에 꼭 가보고 싶은데, 이를 위해 돈을 모으려 한다. 얼마 전 사진도 찍을 겸 다녀온 부산 여행을 기념해서 파란색으로 네일을 하고 머리도 보라색으로 염색했다. 옷 쇼핑도 좋아하고 스스로를 꾸미는 것도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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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지고, 회복하다
진화 님은 시설과 체험홈에 살던 시절에는 힘든 일이 생겨도 늘 참기만 했다. 그런데 지원주택에 온 이후 더는 참지 않게 됐다. 같이 울어주고 위로해주는 선생님도 있고, 꾹꾹 눌러왔던 감정을 터뜨려도 될 만큼 안전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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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 님이 지원주택으로 이사하는 과정에서 오류가 생겼다. 입주 전, 원하는 룸메이트를 써 내라기에 그렇게 했는데, 체험홈에 함께 살았던 가장 친한 친구와 같은 집에 배정받지 못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땐 이미 다 결정된 이후라 항의하지 못했다. 늘 의지하고 붙어 다니던 친구였다. 떨어져 지내기가 힘들어 같은 건물 내 다른 층에 있던 그 친구네 집에 짐을 다 싸 들고 가서 몇 개월 함께 살다시피 했다. 방을 혼자 쓰는 게 아무리 좋았어도 그 친구와 지내는 일이 더 중요했다.
“내 자신이 초라해 보여서. 그냥 처음에 그 친구 이름만 쓸 걸. 고민 엄청했어요. 왜 세 명이라고 적어갖고. 화가 났어요. 나는 00이랑 00랑 같이 살겠다고 했는데 왜 이렇게 정하지 하면서 시설에 화가 났어요.”
“그 친구가 너무 좋아서 같이 살고 싶어서. 원래는 하루만 있다 가려고 했는데 너무 좋아서 있다 보니까 점점점 시간이 점점점 길어지는 거예요. 그때 터진 거예요, 우울증이.”
좋아하는 친구와 같이 있었음에도 우울이 점점 심해졌고 자해하기도 했다. 그때는 “그냥 사는 게 힘들었다”. 계속 그 친구와 살 수는 없었고 결국 6개월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지금과 달리 당시는 활동지원사 선생님이 지원주택에 방문하지 않던 때라, 생활에 필요한 도움을 가까이에서 받기가 어려웠다. 그나마 지원주택에 상주하는 코디네이터 선생님들에게서 돌봄을 받을 수 있었다. 병원에 잠시 입원했다가 돌아온 뒤 한 달 정도 커뮤니티룸에서 선생님들과 함께 잠을 잤다. 밤을 함께 견뎌줄 사람들이 곁에 있으니 비로소 마음이 편해졌다. 그때 지원주택 운영 기관의 센터장과 특히 친해졌다. 서로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면서 가까워졌다. “존경하는 분”이라고 거침없이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
“사무실에서 선생님들이랑 같이 자고 그랬어요. 제가 너무 힘들었거든요. 그래서 병원에 갔거든요. 그런데 병원에 가서 새벽에 울었거든요, 집에 가고 싶어서. 그리고 또 다시 선생님들한테 말해갖고. 집에 가고 싶다고. 가서 커뮤니티룸인가 선생님들 있는 데서 잤어요, 선생님들이랑 같이.”
“센터장님이랑도 같이 울고 그랬거든요. 엄청 힘들다고. 근데 센터장님이 아니라고, ‘우리가 미안하다’ 이러면서 울었거든요. 그게 저는 뭔가 고맙고. 뭔가 뿌듯하고 뭔가 감사했어요.”
이처럼 자립하는 과정에서 여러 힘든 일이 있었지만, 진화 님은 “자립은 행복”이고 “자유”라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지금처럼 열심히 적금을 부으며 돈을 모아서 친구와 함께 살 수 있는 집으로 이사하고 싶다는 바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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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가가 되어가다
진화 님이 현재 일하는 ‘피플’은 지원주택 코디네이터 선생님의 소개로 알게 된 곳이다. 장애인 당사자 활동가로서 집회에 참여하거나 연극을 하기도 하고, 발달장애인 자립생활센터에 가서 자립에 대한 강의도 진행한다. 처음 세종시 정부청사 앞에서 열린 집회에 갔을 때가 기억난다. 신기한 경험이었지만 사람들이 다가오는 게 무섭기도 했다.
계속
“이렇게 ‘투쟁! 투쟁!’ 외치니까 처음에는 좀 무서웠거든요. 근데 신기했어요.”
피플에서 일한 지 벌써 1년이 넘었다는 걸 생각하면 “뭔가 설레”는 기분이 든다. 스스로 여기까지 온 게 대단하게 느껴진다. 피플은 다양한 활동 경험을 쌓으면서 동시에 삶의 어려움을 이해해주고, 살아가는 일 전반에 지지와 응원을 보내주는 동료들을 만난 곳이다.
“피플은... 처음에는 힘들었거든요. 왜냐하면 동료들이 좀 어색했거든요. 어색하고 친해지기가 어려웠거든요. A라는 친구가, 이렇게 안경 쓰는 분이 있거든요. 그분 옆에서 운 거예요, 제가 갑자기. 그래서 A가 놀래갖고 ‘진화 왜 울어?’ 이래서 힘들다고 했거든요. 근데 그걸 또 A 말고 B가 본 거예요. 그래서 B랑 C랑 이야기를 해갖고 제가 한 일주일인가 이주일인가 쉬었거든요. 너무 힘들어서. C가 좀 쉬고 나서 이야기를 해보자고 해서 그렇게 했어요.”
“피플 다니면서도 (우울이) 좀 없어진 것 같고. 사람들이 옆에서 응원해줬어요. 응원해주고 선물 같은 거 주고 그냥 맛있는 것도 주고. 그래서 아 사람들이 이렇게 응원해주는데 나도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살아야겠구나 생각을 했죠.”
피플에서는 장애인으로서의 스스로를 긍정하며 일할 수 있어서 좋다. 시설에 사는 동안에는, 첫 직장에서 친해진 동료가 집이 어딘지 물어봤을 때 대답하기를 꺼렸다. 일하는 내내 장애인이라는 사실도 들키지 않으려고 애썼다.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동정이나 연민의 대상이 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첫 직장에 있을 때는 장애인이라는 걸 숨겼거든요. 어떻게 해서든 안 틀리려고 열심히 노력했거든요. 피플에서는 티를 내도 뭐라고 할 사람이 없거든요. 그런데 거기는 티를 내면 손가락질 같은 걸 하거든요. ‘아 쟤 못한다’ 그러고. 안 시키고. 뒤에서 욕하고 그러거든요.”
“엄청 애썼어요. 안 틀리려고. 시설에 있던 걸 숨겼어요. 근데 피플은 이렇게 뱉어도 뭐라고 할 사람이 없어서 너무 편했어요.”
“친구랑 곱창을 먹다가 친구가 ‘진화는 어디서 살아?’ 그래서 나는 보육원에서 왔다고 거짓말을 했거든요. (장애인) 시설이 아니라. 공원에서 부모님이 버렸다고 하니까 안타까워하더라고요. 근데 안타까워하니까 기분이 좀 나쁘더라고요. (...) ‘왜 보육원에서 왔다고 하니까 안타깝다 하지’라고 생각했어요. 시설에서 살았다 하면 더 안타깝다고 할 거 같아서 말을 안 하게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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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하고 경험하다
시설에서의 경험이 피플에서 일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했다. 자립 생활에 대한 강의를 나갔을 때 특히 그랬다. 시설에 살아본 덕에 교육을 들으러 온 당사자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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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은 좀 어려워요. 당사자분들에게 다가가야 하니까 되게 힘들거든요. 대화를 안 하는 분들도 있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처음에는 힘들었는데 하다 보니까 제가 시설에는 살아봐서 알겠더라고요. 언니들이 힘들구나, 말을 못 하는 거구나, 그냥 표현을 알게 되더라고요. 말 안 해도 웃으면서... 웃거든요, 언니들이. 웃을 때가 예쁘거든요. 그런 걸 보고 알았어요.”
“시설에 살던 생각을 해본 거예요. 아, 우리 시설 언니들도 저렇게 좋았는데. 이런 생각도 하고. 좀 어렵긴 했는데 그래도 재밌었어요.”
“피플에서 안 해본 것도 해보고. 교육, 강의하러 가는 것도 안 해봤었거든요. 엄청 떨고 그랬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이 잘 들었다고 하면서 ‘고맙습니다’ 그러니까 뿌듯했어요.”
자립에 대한 강의를 하는 것은 새롭게 도전해본 일인데, 사람들이 잘 들어주고 질문도 많이 해서 뿌듯했다. 힘든 일이 있어도 자립을 포기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
첫 직장에서처럼, 피플에서 일하는 것도 “힘들었는데 하다 보니까 재미있”다. 사람들과 어울려 관계 맺으면서 즐거운 순간들을 함께 공유하는 게 큰 기쁨이다.
“기자 회견도 가고, 워크숍도 가고 그랬거든요. 그런 게 저는 해보고 싶었거든요. 워크숍 해보니까 처음에 힘들었어요. 세종시 갔다 오니까 힘들었는데. 하다 보니까 재미있는 거예요. 밤에 야식도 먹고 (웃음) 떡볶이나 그런 걸 먹었거든요. 맥주나. 맛있더라고요. 워크숍인데 너무 재미있었어요. 또 가고 싶어요.”
진화 님은 앉아서 일하는 것보다 서서 일하는 것을 좋아해서 서비스업에 종사하고 싶다. “애슐리나 자연별곡이나 그런 뷔페 같은” 곳에서의 일이 잘 맞는다고 생각한다. 승진해서 돈도 많이 벌고 동료들과 상의해서 연차도 자유롭게 쓰고 싶다. 그렇지만 우선은 피플에서 계속 일할 생각이다. 가능하면 집도 직장 근처로 이사하고 말이다.
8
미래를 그려보다
얼마 전 진화 님은 힘든 시기를 지나온 자신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스스로에게 스마트워치를 선물했다. 시계를 찬 팔목을 자랑스럽게 바라보면서 회복으로 이끈 내면의 힘을 기억한다.
계속
“제 자신한테 선물해주고 싶어서 샀어요. 그냥 고생했다고 (...) 마음고생 하고 힘든 일도 있었고. 그래서 선물을 해주고 싶었어요.”
진화 님은 자신이 “유쾌하고 재밌고 사람들한테 잘 맞춰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게 너무 좋고, 10년 후 자신의 모습을 그려봤을 때도 만나면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일 거라고 생각한다. 미래에 결혼을 한다면 딸을 낳고 싶다. 텔레비전에서 출산 및 육아와 관련한 프로그램도 열심히 봤다. 출산과 육아가 아주 어려운 일일 거라는 생각은 들지만, 딸 둘의 이름도 벌써 지어뒀다. ‘하늘’과 ‘지은’이다.
“나 같은 딸을 낳았으면 좋겠어요. 낳아갖고 조언 같은 거 해주고 싶어요. ‘힘든 거 있으면 엄마한테 말해’ 이러고.”
첫 딸의 이름이 ‘하늘’인 이유는 진화 님에게 좋은 삶이란 ‘하늘’의 이미지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하늘을 떠올리면 마음이 편해지면서 날아가고 싶다. 또 진화 님에게 좋은 삶은 ‘태양’이기도 하다. 뜨겁지만 포근하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스스로를 격려하면서, 따뜻하고 편안한 곳에서의 자유롭고 행복한 자립 생활을 꿈꿔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