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시원에 사는 동안 영구 임대 주택, 매입 임대 주택에 입주를 신청했고 둘 다에 당첨됐다. 영구 임대 주택에 들어가기로 결정한 뒤 태화샘솟는집*에서 운영하는 둥지주택**에서 6개월 정도 생활했다. 이후 2016년 3월 영구 임대 주택에 입주해 지금까지 살고 있다.
*정신 질환자가 지역 사회에서 존중받는 동료이자 구성원으로 살아갈 수 있게 거주, 취업, 교육 등을 지원하는 기관.
**태화샘솟는집에서 운영하는 주거 공간으로, 정신 질환자가 자립하기 전 통상 6개월가량 머물며 독립 생활을 경험하고 준비하는 곳.
“고시원도 살아봤고 맨 처음에는 그룹홈에서 공동 생활 하다가 반독립 가서 살다가 다시 고시원 살다가 둥지주택으로 갔다가 영구 임대로 와서, 거칠 수 있는 건 거의 다 거쳤다고 볼 수 있죠, 집에 있어서는. 밑바닥에서부터 다 거쳐서 지금은 그래도 행복하다 생각하죠.”
일도 쉬지 않고 했다. 태화샘솟는집에서 일자리를 연결해줬는데, 한 달에 10여만 원 겨우 버는 편의점 청소부터 시작해서 대형마트에서 야간 설거지를 하다가 대학 병원 투석실에서도 일했다. 투석실에서는 계속 환자와 만나고 피를 봐야 했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힘들었고, 담당 사회 복지사와 상의해 그만뒀다. 이후 우체국에서 일하기 시작해 지금도 다닌다. 당시 태화샘솟는집에서 우체국 일자리가 들어왔다고 회원들에게 소개했는데, 다들 너무 힘들 거라는 선입견이 있어서 마다했다. 제식 님은 한번 도전해보고 싶었다. 현재 아주 만족하고 있다.
“일은 꾸준히 해왔어요. 주유소 그만두고 태화에서 처음 연결해줬던 게 편의점에서 청소하는 일. 한 달 해봐야 한 12~3만 원밖에 못 받는 그런 일에서 시작해서 지금은 돈 100만 원 받는 일 하고 있어요. 편의점 일이 시발점이 된 거죠.”
우체국에서 일하면서 급여가 거의 배가 됐고, 덕분에 삶에 여유가 생겼다. 이를 계기로 미래를 전보다 희망적으로 보게 됐다. 매일매일 정해진 시간에 출퇴근하고 외부에서 강연하거나 미팅할 일이 생기면 미리 연차를 쓴다. 우체국의 다른 공무원과 거의 같은 대우를 받는다는 점이 마음에 들어 정년까지 일하고 싶다. 더 효율적으로 일하기 위해 동료들과 서로 논의도 하고 우체국에 건의도 한다. 심지어 시급으로 쳐주지 않지만 정시보다 일찍 출근해 일하기도 한다.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임무를 제대로 완수해내고 인정받아 우체국 일을 계속하고 싶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정신 질환자를 향한 사회적 편견을 깨고 싶어서다. 정신 질환자는 함께 일하기에 어렵고 위험하다고들 생각하지만, 자신과 동료들처럼 성실하고 진지하게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면서 조직에 기여할 수도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싶다
“사회적인 편견. 저는 그걸 깨뜨리고 싶어요. 우체국에 왜 그렇게 일찍 가서 손해를 보면서도 일하냐면, 그런 이유 때문이에요. 윗사람들이 볼 테니까. 우리 태화뿐만이 아니라 다른 기관들도 있잖아요, 정신 장애인 기관들. 거기 있는 사람들이 많이 취업이 될 수 있는 방향으로 물꼬를 터주고 싶어요. 정신 질환자를 향한 편견을 좀 깨버리고 싶다는 게 열심히 하는 이유 중에 하나예요.”
이렇게 열심히 미래를 계획하는 이유가 또 있다. 삶의 동반자가 생긴 것이다. 소개로 만나 함께 미래를 약속했다. 둘째 누나에게도 인사를 시켰고 상대방 가족도 만나봤다. 지켜주고 싶은 사람, 그리고 함께 지키고 싶은 울타리가 생겼다. 평생을 함께하고픈 동반자 외에도, 태화샘솟는집에 회원으로 등록하면서 지속적으로 만나게 된 동료들이 곁에 있다. 동료들과 가끔 하는 외식은 일상의 큰 재미다. 영구 임대 주택을 구한 경험을 바탕으로 주변인들이 영구 임대 주택이나 매입 임대 주택에 당첨될 수 있게 돕기도 했다. 가족 중에는 둘째 누나와 쭉 가깝게 지내면서 제식 님 쪽에서 생일이나 명절에 용돈을 보내기도 한다.
“둘째 누나는 그래도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라고 저를 인정해주고 지지해주고 이러니까 굉장히 고마운 거죠. (…) 다른 누나들이 손떼려고 할 때 저를 포기하지 않고 잡아줬기 때문에 감사한 마음이 있어서 그냥 별 건 아니지만, 약소하지만... (용돈을 드렸어요.) 기쁘게 받으시더라고요. 네가 어떻게 번 돈인데 이걸 주냐고. 그래도 네가 나를 생각해서 주는 거니까 잘 쓰겠다고. 그렇게 누나하고 유대 관계를 갖고 지내고 있죠.”
제식 님에게 좋은 삶은 매일매일 할 일이 있는 것, 그래서 대단하지는 않아도 계획한 미래로 조금씩 조금씩 다가가는 것이다. 제식 님에게는 일이 원동력이자 활력소다. 매일의 할 일은 부정적인 생각에서 벗어나 앞으로 한 발씩 나아가게 해준다.
“파트타임이든 서너 시간짜리 일이든 일을 하는 것 자체에 의미를 많이 둬요. (...) 일이라는 게 저한테는 삶의 원동력, 활력소라고 하나요. 그런 걸 주는 것 같아요. 엔돌핀도 도는 것 같고 일을 하면서 어떤 만족감, 행복감도 느끼고. 물론 금전적인 보수를 받아서 좋기도 하지만 정신 건강이 많이 좋아지는 것 같고. 일할 때는 굉장히 집중하기 때문에 잡생각을 할 시간이 없어요. 아주 그냥 바쁘게 돌아가니까. 그게 저는 더 좋은 것 같아요.”
그러니 제식 님에게 좋은 삶이란 ‘일’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면서 미래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여기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일은 혼자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정신 질환을 앓는 사람도 각자의 ‘삶’을 살아가며 사회 구성원으로서 충분히 한몫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강연과 인터뷰 등을 통해 경험을 나누는 데 열심인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다. 제식 님은 스스로에게 ‘지금까지 잘 해왔어’, 그리고 ‘앞으로는 더 나은 삶이 있을 거야’라고 말을 건넨다. 자신에게만 하는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환자 가족분한테는 항상 그런 얘기를 해드려요. 편견을 갖지 말고 그냥 할 수 있다는 믿음을 주고 그다음에 울타리가 되어달라. 그러면 분명히 자녀분들은 저보다 나아지고 앞으로 더욱더 비전이 있을 것이다. 지켜봐달라. 조금 늦을 수도 있고 빠를 수도 있다. 사람의 기능에 따라서 좀 차이가 나잖아요. 차이가 있을지 몰라도 분명히 좋아질 수 있으니까 포기하지 마시고, 일어서려고 할 때는 손을 잡아주십시오. 울타리가 돼주십시오.”
“너 참 잘 살아왔어. 이만하면 참 잘했어. 그런 말을 저한테 해주고 싶어요. 그동안 수고 많았어. 고생했어. 한마디 덧붙이자면, 앞으로는 너의 인생이 또 더 나아질 거야. 이런 생각을 하면서 저 자신을 토닥이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