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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제식 님의 이야기

매일 조금씩 더 나은 내일로



🔦

좋은 삶 | 꿈

일이라는 게 저한테는 삶의 원동력, 활력소라고 하나요. 일하면서 어떤 만족감, 행복감도 느끼고, 정신 건강이 많이 좋아지는 것 같고. 일할 때는 굉장히 집중하기 때문에 그게 저는 더 좋은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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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외톨이로 지내다

유제식 님은 1970년 충남 태안에서 4남매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부모님 밑에서 생계에 대한 큰 걱정 없이 살았다. 초등학교 시절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이후에는 어머니 홀로 농사를 관장해 생계를 꾸렸다. 먹을 것이 부족해 아쉬운 일은 없었지만 원하는 물건을 사거나 새로운 경험을 해보기는 어려웠다.

누나가 셋이었는데, 첫째 누나는 일찍 결혼해서 함께 산 기억이 거의 없고 셋째 누나와는 늘 아옹다옹 싸우느라 사이가 좋지 않았다. 나이 차이가 꽤 났지만, 학업을 마치고 집안을 돌보며 어머니를 돕던 둘째 누나와는 사이가 좋고 각별했다.

아버지의 부재는 곧 인생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 도움을 줄 정서적 기반이자 선택의 기로에서 길을 안내하는 존재의 부재였다. 때때로 어머니의 말씀 안에서 아버지의 뜻을 헤아려도 봤지만, 삶의 난관을 헤쳐나가기에 충분한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어머니는 홀로 꿋꿋하게 가족의 생계를 이어갔는데, 제식 님의 욕망과 꿈까지 살피고 지원해주지는 못했다. 제식 님은 학업이나 직업에 관련한 선택을 할 때마다 가장 원하는 것을 얻기보다는 눈앞에서 기회를 놓치는 것 같다고 느꼈다. 아버지의 부재가, 정신 질환이 발병한 이후의 질곡뿐 아니라 인생 전체에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아버님이 계셨다는 건 알지만 사랑은 못 받았죠. 아버지가 오래 사셨더라면 그래도 내가 이렇게까지 고꾸라지지는 않았을 텐데, 이런 생각을 많이 하죠. 아버지의 영향력이 나한테 미쳤으면 인생이 좀 순탄하게 흘러갈 수도 있었을 텐데. 그렇지 못해서 롤러코스터 타듯이 오르락내리락 뭐 이런 식으로 험난한 여정을 겪었다고 생각하고요."

미래를 함께 고민하거나 제식 님을 격려해준 사람은 학교에도 없었다. 친구들과의 관계도 쉽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무리 속에서 어울리는 것이 쉽지 않았고 따돌림을 당하기도 했다. 그래도 고등학교 시절 함께 자동차 업계에서 일하기를 꿈꿨던 친구와는 정신 질환을 앓는 지금까지도 연락하고 지낸다.

“제가 어렸을 때도 성격이 좀, 쉽게 얘기하면 모난 성격이라고 하죠. 왠지 외톨이 같은 성격. 혼자 노는 것, 혼자 있는 것 좋아하고 그러다 보니까 학교 다니면서 친구가 별로 없었어요. 무리 속에서 잘 어울리지 못했으니까. 그리고 친구들이 또 저를 좀, 요즘 식으로 얘기하면 ‘왕따’시킨다거나 그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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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힘으로
꿈을 이루다


제식 님은 현대나 대우, 기아의 자동차 조립 공장에서 일하는 것이 가장 안정적이면서 전망도 좋으리라고 생각했다. 농업 고등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자동차 기술이 없어 공장에 정식으로 입사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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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친한 친구는 공장에 가족의 지인이 있어 알음알음으로 취직했다. 제식 님은 뒷돈을 줘서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통상적으로 이뤄지는 일이었기에 어머니에게 이야기를 꺼냈지만 어렵다는 대답만 들었다. 많은 고민 끝에 한 요청이었다. 금전적인 여유만 있었다면 공장에서 일할 수 있었으리라는 생각에 두고두고 아쉽다. 첫 단추를 잘 끼웠더라면 지금처럼 정신 질환에 시달리며 고난을 겪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세상 물정을 모르는 거지. 돈에 대한 개념도 없었고 대출이 뭔지, 부동산이 뭔지, 거래의 기본이 뭔지도 모르고 살 때니까. 고등학교 졸업한 촌뜨기가 뭘 알면 얼마나 알겠어요. 근데 매형도 제가 자동차 공장에 가는 것을 좀 싫어했던 것 같아요, 내심. 그래서 일부러 (대출이라는 방법을) 안 가르쳐 준 것 같기도 하고. 다른 매형들도 얘기 안 해줬고, 누나들도 얘기 안 해줬고, 친구도 얘기 안 해줬고. 그래서 기회를 놓쳤죠. 대우자동차 들어갈 기회를. 들어갔더라면 아마 병도 안 났을 거라고 봐요. 그때 들어가서 자동차 공장에서 생활을 잘 하고 적응해서 살았더라면 병이 안 나지 않았을까 생각도 하는데. 어떻게 보면 이런 병을 갖게 된 것도 제 운명이겠죠. 이렇게 살아야 하나 보다, 그냥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거죠.”

도시에서의 삶이 궁금했고 농사는 미래가 없어 보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큰 매형이 운영하는 공장에서 일을 배워 유리 재단사가 됐다. 4년쯤 지나 매형 지인의 공장에 일을 도와주러 갔다가 산재를 당했다. 얼굴 뼈가 다 부러졌고 대수술을 두세 번은 했다. 다시 일해보려고 했지만, 트라우마 때문에 불가능했다.

보상은 받았지만, 유리 공장에서 나오고 나니 할 일이 없어 막막했다. 고민하던 시기에 신문에서 자동차 정비 학원에 관한 정보를 우연히 발견했다. 그 학원에 무작정 찾아가 사정을 얘기했다. “인복이 있었는지” 원장이 숙식을 제공하는 주유소를 소개해준 덕에 그곳에서 일하며 자동차 정비 기능사 자격증을 따고 카센터에 취업했다. 일이 계속해서 잘 풀릴 모양이었는지, 카센터 측에서 기술을 본격적으로 익히려면 큰 사업장에서 일해야 한다며 원효로 자동차 정비소(이하 원효로 사업소)로 가보라고 추천해줬다. 자동차의 작동 원리를 속속들이 배워가며 수리하는 과정이 무척 즐거웠다. 기술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어려운 사례를 해결해나가면서 최고의 자동차 기술자가 되는 꿈을 키웠다.

“저는 기술자로서 하고 싶었던 데까지 다 올라가봤고, AS 총괄 관장까지도 했거든요. (...) 직책도 올라갈 때까지 올라가봤고 사람도 다뤄볼 만큼 다뤄봤고. 최고가 되고 싶었어요.”

“밑바닥에서부터 선배들한테 기술을 차근차근 배웠죠. 제가 전문으로 했던 건 전기 쪽이었거든요. 전기 회로도 보는 것부터 해서 선배들한테 많이 배웠죠. 지금도 머릿속에서 어떤 거 회로를 그리라고 하면 그려요. 그 정도로 전기에 정말 많이 집중했고 시간을 많이 투자했어요. 그 시간들이 참 행복했어요. 왜냐하면 기술을 하나 습득해나가고 내가 배워나가고 커리어가 그만큼 올라간다는 생각을 하니까.”

제식 님은 원효로 사업소에서 기술 면에서는 목표했던 최고점에 도달했다. 하지만 사내 인간관계가 갈수록 어려워졌다. 엄격한 위계질서 속에서 상사는 계속해서 부담을 줬고, 신입사원이나 동료와는 무섭게 경쟁해야 했다. 내성적이고 소심해 불편한 마음을 누구에게도 편히 터놓지 못했다. 결국 사람들이 미워지고 조금도 함께 있기가 어려워졌다. 그렇게 퇴사를 결심하게 됐다.

“상사들하고 많이 부딪혔어요. 지금은 성격이 많이 바뀌었는데 그때는 좀 소심하고 내성적이었다고 해야 하나요. (...) 싫은 사람하고는 1분 1초도 보기 싫었어요. 한솥밥을 먹으면서 그렇게 미워한다는 게 심적으로 너무 괴롭고 힘들고, 꾹꾹 눌러 참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퇴사했죠. 10년 근무하고. 상사들하고 마찰도 많고 스트레스도 받고 밑에서는 치고 올라오고. 위에서는 찍어 누르고 압박하고 그러니까 중간 입장에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니까 결국에는 튕겨 나온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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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져 내리다

자동차 전문 정비사로 산 10년은 최고의 기술자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한 시간이었다. 직장 근처에 방을 얻어 자취했고 열심히 번 돈으로 부천에 아파트를 샀다. 오직 일 생각뿐이었고 재테크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어 아파트는 그저 비워뒀다. 퇴사 후, 소유했지만 한 번도 살아보지 않은 아파트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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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해야 할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과거에 겪은 일들이 밤새 떠올라 잠을 잘 수가 없었다. 6개월간 생각들에 사로잡혀 결국 무너져 내리는 경험을 했다. 이후 병원과 집을 오가는 생활을 반복했다.

“한 10년 기술자 생활을 하다가 막상 손을 딱 놓고 나니까 막막한 거예요. 현실이 탁 와닿으니까 뭘 해야 하지? 내가 지금 뭘 해야 하지? 뭐 때문에 그만뒀지? 막 딜레마에 빠지는 거예요. 그게 하루가 이틀이 되고 사흘이 되고 계속되다 보니까, 밖에도 안 나가고 그러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우울증이 온 거예요. 우울증 오면서 그때부터 병원 생활이 시작됐어요.”

“(우울증을 심하게 앓던 때는) 사리 분별력이나 모든 상황에 대한 판단 능력이 완전히 다 제로로 떨어져 있었다고 보시면 되거든요. 망상, 잡생각에 사로잡혀서 밤에는 계속 베란다에서 현관까지 왔다 갔다 하고. 20년 넘게 쌓인 오만 생각을 다 하는 거예요. 그러다 낮에는 지쳐서 쓰러져 자고, 그런 생활을 한 6개월 가까이 했습니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도움을 요청했지만, 누구도 응해주지 않았다. 때론 답답했고 때론 위급한 상황에 처했다고 느꼈다. 한편으로는 늘 무력했다. 어느 날은 상담 기관에 전화도 해보고, 서울역에서 노숙하는 사람을 만나 이야기도 해봤다. 그러고 나면 마음을 다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오래 가지 않았다. 무엇보다 마음 아팠던 것은 도와달라는 요청을 가족들이 거절한 일이다. 첫째·셋째 누나도, 조카들도 제식 님을 외면했다.

“제가 생명의 터*에 전화를 했어요. 그랬더니 할머니가 한 분 와주셨거든요. 5만 원을 딱 주고 가시더라고요. 일면식도 없는데. 그때 할머니가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래도 인생이라는 게, 한번 살아볼 만한 가치가 있는 거다. 자식 같아서 이 돈을 주고 가는 거니까 받으라고 그러시더라고요. 아, 세상에 이런 사람도 있구나. 그래, 다시 한 번 살아보자. 오기가 발동하는 거예요.”

*‘한국 생명의 전화’ 대전 지부 산하에 있으며, 정신 질환자의 사회 복귀를 돕는 재활 시설

그나마 둘째 누나가 제식 님을 믿어줬다. 병이 재발해 입원할 때마다 누구도 제식 님이 나아질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지만, 둘째 누나만큼은 믿고 지지해줬다. 둘째 매형도 제식 님이 어려운 상황에 처할 때마다 조언을 건넸다. 힘들어서 목숨을 끊으려고도 해봤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죽고 싶을 만큼 힘든 자신을 누나들 중 둘이 포기했다는 것이 회복하기 어려운 상처로 남았다. 특히 경제적인 도움이 절실한 상황에서 외면당했다는 사실은 여전히 납득하기 어렵다. 자신의 존재가 가족으로서 받아들여지지 못했다고 느꼈고, 두 누나와 관계를 회복하고 싶은 생각도 사라졌다.

“누나들한테 도움 요청했는데 여러 번 거절당하고. 조카들한테도 부탁했는데 또 거절당하고...”

“우울증 발병하고 정신과 약을 먹고 그러다 보니까 큰 누나, 막내 누나는 저를 완전히 포기했어요. 그래서 연락을 안 해요. (...) 서운하고 섭섭했던 게 뭐냐 하면, 내가 그렇게 힘든 상황에 놓여 있고 죽느냐 사느냐 하는 기로에 서서 죽으려고 몇 번씩이나 시도해보고… 그런 상황까지 간 걸 봤으면 조금이라도, 금전적으로라도 도와줬더라면. 진짜 아닌 말로다가, 일어서려고 하는 사람을 뒤에서 부축해주면 힘들어도 결국 일어서야겠다는 의지라도 생길 거 아니에요. 그런데 뭐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그냥 남 대하듯이. 아니, 남보다 못하게 대하니까 너무 진짜 섭섭하고 나는 가족의 구성원도 아니고 동생도 아니고. 그러면 아무것도 아니네.”

우울증 발병 후 여러 차례 정신 병원을 들락거렸다. 병원 생활이 답답해 퇴원하면 병세가 다시 악화됐다. 공기 좋고 물 좋은 곳에도 가봤지만 너무 비싸서 금세 나와야 했고, 우울증이 심해질 때마다 강제 입원 절차에 따라 두세 번 더 다른 병원에 들어갔다. 이 지난한 과정을 거치는 동안 진단명이 정신 분열증이 되고, 정신 분열증이 조현병이라는 새 이름을 얻고, 법률 개정에 따라 강제 입원 절차가 까다롭게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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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정비하고
다시 일어서다

자동차 정비공으로 10년을 일해 구매한 아파트를 치료비로 처분하고 나자 퇴원 후 돌아갈 곳이 없었다. 담당 의사가 가족이 아닌 사람들이 모여 생활하는 시설인 그룹홈을 추천해줬고, 그렇게 해서 서울 강서구에 자리한 여울목 그룹홈에 들어가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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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주하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그룹홈 측은 여러 차례 자살을 시도한 제식 님을 맞아들여도 좋을지 고심했다. 그러다가 앞날의 가능성을 본 것인지 결국 자리를 내줬다. 그곳에서 생활하며 주유소를 소개받아 다시 일하기 시작했다. 주유소에서 일한 4년 반은 스스로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시간이었다.

“삶의 목표 의식이 딱 서니까 이제 앞만 보고 가야겠다는 생각밖에 안 드는 거예요. 뒤를 보면 볼수록 후회밖에 안 들잖아요. 지나온 날들만 생각나고 후회밖에 안 해요. 그런 건 과감하게 잊어버리자. 앞으로가 더 중요하지, 뒤돌아봐야 의미 없고 어리석은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 과감하게 버렸죠. 지나간 건 지나간 거고, 지금 현실에 충실하고 만족하면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건지, 그것만 생각하자. 그래서 앞으로 살 것만 생각하고 쭉 걸어왔어요.”

자동차 정비 기술자로서는 자동차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핵심 임무였다면, 주유소 직원으로서는 고객을 어떻게 응대하는가가 아주 중요했다. 주유소 사장은 제식 님이 고객을 대하는 태도나 표정을 바꾸기를 계속해서 요구했다. 성격상 쉽지 않은 일이라 매일 거울을 보면서 웃는 표정을 연습을 하기까지 했다. 해가 갈수록 표정도, 성격도 밝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시간 동안 자신을 새롭게, 깊이 살펴보기도 했다. 작동 원리에 근거해 자동차를 분석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일을 업으로 삼았던 제식 님은, 자신의 문제에도 같은 접근법을 적용해봤다. 원효로 사업소 퇴사 이후에는 40여 년의 인생에서 해결하지 못한 모든 문제를 밤마다 떠올리고 곱씹다가 무너져 내려 결국 병원에 갔다. 그때와 달리 이번에는 “도 닦는 심정으로” 자신을 들여다보면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장단점은 무엇인지, 어떻게 스스로를 힘들게 했고 어떻게 했다면 결과가 달라질 수 있었을지 찬찬히 살펴봤다. 수십 번 반복해서 읽은 『명심보감』, 그리고 그룹홈에서 방을 같이 쓴 형과의 대화가 큰 도움이 됐다.

깨달은 바가 있으면 일상에서 실천에 옮기며 스스로 변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자신의 문제를 발견할 때마다 바로잡아가기 위해 애썼다. 그렇게 그룹홈에서 생활하는 동안 매일매일 노력하다 보니 성격이 바뀌었다.

“어떻게 보면 기계처럼 저를 분석한 거죠. 자동차 문제의 원인을 분석하듯이 나 자신을 분석해본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하나씩 보이는 거예요. 나한테 이런 문제점이 있구나, 이런 게 잘못됐구나, 이걸 고쳐야겠구나. 이렇게 해서 바로잡아나간 거죠, 하루하루. 하루아침에 달라진 게 아니라, 여의도 현대주유소에서 4년 반 일하면서 매일 노력하다 보니까 성격이 확 바뀌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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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 함께
새로이 그려가다

주유소에서 4년 반을 보낸 이후 제식 님은 주거, 일, 관계를 하나씩 새롭게 준비하면서 삶을 자신이 원하는 안정적인 방향으로 이끌어갔다. 그룹홈에서 3년, 반독립 주택에서 2년가량 생활한 뒤 거처를 옮겼다. 가족에게 도움을 청하고 싶지 않아 약 2년을 고시원에서 살았다. 주거급여 수급권자라는 점을 활용해 미래를 준비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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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시원에 사는 동안 영구 임대 주택, 매입 임대 주택에 입주를 신청했고 둘 다에 당첨됐다. 영구 임대 주택에 들어가기로 결정한 뒤 태화샘솟는집*에서 운영하는 둥지주택**에서 6개월 정도 생활했다. 이후 2016년 3월 영구 임대 주택에 입주해 지금까지 살고 있다.

*정신 질환자가 지역 사회에서 존중받는 동료이자 구성원으로 살아갈 수 있게 거주, 취업, 교육 등을 지원하는 기관.

**태화샘솟는집에서 운영하는 주거 공간으로, 정신 질환자가 자립하기 전 통상 6개월가량 머물며 독립 생활을 경험하고 준비하는 곳.

“고시원도 살아봤고 맨 처음에는 그룹홈에서 공동 생활 하다가 반독립 가서 살다가 다시 고시원 살다가 둥지주택으로 갔다가 영구 임대로 와서, 거칠 수 있는 건 거의 다 거쳤다고 볼 수 있죠, 집에 있어서는. 밑바닥에서부터 다 거쳐서 지금은 그래도 행복하다 생각하죠.”

일도 쉬지 않고 했다. 태화샘솟는집에서 일자리를 연결해줬는데, 한 달에 10여만 원 겨우 버는 편의점 청소부터 시작해서 대형마트에서 야간 설거지를 하다가 대학 병원 투석실에서도 일했다. 투석실에서는 계속 환자와 만나고 피를 봐야 했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힘들었고, 담당 사회 복지사와 상의해 그만뒀다. 이후 우체국에서 일하기 시작해 지금도 다닌다. 당시 태화샘솟는집에서 우체국 일자리가 들어왔다고 회원들에게 소개했는데, 다들 너무 힘들 거라는 선입견이 있어서 마다했다. 제식 님은 한번 도전해보고 싶었다. 현재 아주 만족하고 있다.

“일은 꾸준히 해왔어요. 주유소 그만두고 태화에서 처음 연결해줬던 게 편의점에서 청소하는 일. 한 달 해봐야 한 12~3만 원밖에 못 받는 그런 일에서 시작해서 지금은 돈 100만 원 받는 일 하고 있어요. 편의점 일이 시발점이 된 거죠.”

우체국에서 일하면서 급여가 거의 배가 됐고, 덕분에 삶에 여유가 생겼다. 이를 계기로 미래를 전보다 희망적으로 보게 됐다. 매일매일 정해진 시간에 출퇴근하고 외부에서 강연하거나 미팅할 일이 생기면 미리 연차를 쓴다. 우체국의 다른 공무원과 거의 같은 대우를 받는다는 점이 마음에 들어 정년까지 일하고 싶다. 더 효율적으로 일하기 위해 동료들과 서로 논의도 하고 우체국에 건의도 한다. 심지어 시급으로 쳐주지 않지만 정시보다 일찍 출근해 일하기도 한다.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임무를 제대로 완수해내고 인정받아 우체국 일을 계속하고 싶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정신 질환자를 향한 사회적 편견을 깨고 싶어서다. 정신 질환자는 함께 일하기에 어렵고 위험하다고들 생각하지만, 자신과 동료들처럼 성실하고 진지하게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면서 조직에 기여할 수도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싶다

“사회적인 편견. 저는 그걸 깨뜨리고 싶어요. 우체국에 왜 그렇게 일찍 가서 손해를 보면서도 일하냐면, 그런 이유 때문이에요. 윗사람들이 볼 테니까. 우리 태화뿐만이 아니라 다른 기관들도 있잖아요, 정신 장애인 기관들. 거기 있는 사람들이 많이 취업이 될 수 있는 방향으로 물꼬를 터주고 싶어요. 정신 질환자를 향한 편견을 좀 깨버리고 싶다는 게 열심히 하는 이유 중에 하나예요.”

이렇게 열심히 미래를 계획하는 이유가 또 있다. 삶의 동반자가 생긴 것이다. 소개로 만나 함께 미래를 약속했다. 둘째 누나에게도 인사를 시켰고 상대방 가족도 만나봤다. 지켜주고 싶은 사람, 그리고 함께 지키고 싶은 울타리가 생겼다. 평생을 함께하고픈 동반자 외에도, 태화샘솟는집에 회원으로 등록하면서 지속적으로 만나게 된 동료들이 곁에 있다. 동료들과 가끔 하는 외식은 일상의 큰 재미다. 영구 임대 주택을 구한 경험을 바탕으로 주변인들이 영구 임대 주택이나 매입 임대 주택에 당첨될 수 있게 돕기도 했다. 가족 중에는 둘째 누나와 쭉 가깝게 지내면서 제식 님 쪽에서 생일이나 명절에 용돈을 보내기도 한다.

“둘째 누나는 그래도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라고 저를 인정해주고 지지해주고 이러니까 굉장히 고마운 거죠. (…) 다른 누나들이 손떼려고 할 때 저를 포기하지 않고 잡아줬기 때문에 감사한 마음이 있어서 그냥 별 건 아니지만, 약소하지만... (용돈을 드렸어요.) 기쁘게 받으시더라고요. 네가 어떻게 번 돈인데 이걸 주냐고. 그래도 네가 나를 생각해서 주는 거니까 잘 쓰겠다고. 그렇게 누나하고 유대 관계를 갖고 지내고 있죠.”

제식 님에게 좋은 삶은 매일매일 할 일이 있는 것, 그래서 대단하지는 않아도 계획한 미래로 조금씩 조금씩 다가가는 것이다. 제식 님에게는 일이 원동력이자 활력소다. 매일의 할 일은 부정적인 생각에서 벗어나 앞으로 한 발씩 나아가게 해준다.

“파트타임이든 서너 시간짜리 일이든 일을 하는 것 자체에 의미를 많이 둬요. (...) 일이라는 게 저한테는 삶의 원동력, 활력소라고 하나요. 그런 걸 주는 것 같아요. 엔돌핀도 도는 것 같고 일을 하면서 어떤 만족감, 행복감도 느끼고. 물론 금전적인 보수를 받아서 좋기도 하지만 정신 건강이 많이 좋아지는 것 같고. 일할 때는 굉장히 집중하기 때문에 잡생각을 할 시간이 없어요. 아주 그냥 바쁘게 돌아가니까. 그게 저는 더 좋은 것 같아요.”

그러니 제식 님에게 좋은 삶이란 ‘일’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면서 미래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여기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일은 혼자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정신 질환을 앓는 사람도 각자의 ‘삶’을 살아가며 사회 구성원으로서 충분히 한몫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강연과 인터뷰 등을 통해 경험을 나누는 데 열심인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다. 제식 님은 스스로에게 ‘지금까지 잘 해왔어’, 그리고 ‘앞으로는 더 나은 삶이 있을 거야’라고 말을 건넨다. 자신에게만 하는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환자 가족분한테는 항상 그런 얘기를 해드려요. 편견을 갖지 말고 그냥 할 수 있다는 믿음을 주고 그다음에 울타리가 되어달라. 그러면 분명히 자녀분들은 저보다 나아지고 앞으로 더욱더 비전이 있을 것이다. 지켜봐달라. 조금 늦을 수도 있고 빠를 수도 있다. 사람의 기능에 따라서 좀 차이가 나잖아요. 차이가 있을지 몰라도 분명히 좋아질 수 있으니까 포기하지 마시고, 일어서려고 할 때는 손을 잡아주십시오. 울타리가 돼주십시오.”

“너 참 잘 살아왔어. 이만하면 참 잘했어. 그런 말을 저한테 해주고 싶어요. 그동안 수고 많았어. 고생했어. 한마디 덧붙이자면, 앞으로는 너의 인생이 또 더 나아질 거야. 이런 생각을 하면서 저 자신을 토닥이고 싶어요.”